오욕의 허물을 벗고 정유년 희망의 태양이 다시 솟았다
논설주간 강성보
새해가 밝았다. 병신년의 마지막 태양을 서쪽 산 능성 너머로 떠나보내고 오늘 아침 동해 바다에서 힘차게 솟아오른 정유년의 첫 태양을 맞았다. 매일매일 똑같은 자연현상이지만 유독 새해 첫 태양을 바라보는 심정은 각별하다. 저 찬란한 빛을 받아 올 한 해 개인에, 가정에,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열두 달 뒤 다시 연말이 되어 깊은 실망감에 젖어 들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인생은 바라는 대로 다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모두 다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송년사(送年辭)를 할 때나 언론사 신년 사설을 쓸 때 흔히 등장하는 관용구가 있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무슨 무슨 해 운운”이다. 그러면서 대체로 강한 인상과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건사고 10여 건을 나열한다. 어제 자정을 기해 역사의 한 장으로 넘어간 2016 병신년 역시 다사다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찬찬히 꼽아보면 제법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적지 않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 개성공단 폐쇄, 리우 올림픽의 감동, 그리고 미국의 국익을 내세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까지. 그런데 기억이 희미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온 국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 9월 경주 지진마저 아득한 옛날에 벌어진 일 같다. 나이가 듦에 따른 기억력 감퇴 탓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한해를 마감하는 즈음에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의 충격이 워낙 강렬해 이전의 모든 사건에 대한 기억과 감각을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극심한 복통이 찾아왔을 때 웬만한 피부감각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 충격은 몇몇 개인의 것 만은 아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온 국민이 그 충격에 어지러울 정도의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통증은 탄핵정국과 결합돼 해를 넘기면서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특검 수사와 언론들의 치열한 보도경쟁으로 밝혀지고 있는 국정농단의 실태를 보면 정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 평론가의 표현처럼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 하나하나 눈앞의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일개 무당의 딸에게 그토록 농락당할 수 있단 말인가. 뱃속에 욕심만 가득할 뿐 머릿속은 텅빈 것 같은 강남 아줌마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이 어쩌면 그렇게 굽신거리며 머슴을 자처할 수 있었단 말인가. 무자격 '야매' 주사 아줌마들이 청와대를 무시로 들락거리며 국가 2급비밀인 대통령의 건강을 주물렀다는 얘기는 또 뭔가. 박 대통령을 둘러싼 19금 이야기의 소문은 또 어떤 희한한 스토리로 우리들을 놀라 넘어지게 만들 것인가.
이 모든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추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니,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스캔들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제정 러시아 말기 요승 라스푸틴의 스캔들도 최순실 게이트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에 불과할 터이다. 이미 세계의 언론들은 한국의 이 초대형 사건을 실시간으로 중계보도하고 있다. 일본의 한 TV는 주말 오락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대통령을 포함, 이번 사건의 주인공들을 놀림감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참으로 낯을 들 수 없이 창피한 일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건국 이후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쌓여왔던 각종 폐단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종합 비리세트다. 권력과 대기업 간의 고질적인 정경유착, 힘센 자, 가진 자의 어이없는 갑질문화, 그리고 최순실의 딸 정유라 만을 위한 입시부정 등.
온 국민이 여기에 분노하고 절망했지만 지금 탄핵의 벼랑 끝에 서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뒤틀린 리더십과 특검의 칼날 앞에선 그 주변 비선 실세들의 음험한 촉수에만 모든 잘못을 물을 수는 없다. 오랜 기간 그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고 대강대강 덮어뒀던 우리 모두의 탓으로 자책해야 할 것이다.
정묘년 새해 아침 우리는 이 적폐들을 청소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각오를 다져야하는 시점에 서 있다. 더 이상 우리의 자식들이 헬조선, 흙수저의 열패감으로 치를 떨게 할 수는 없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에 대한 범국민적 갈증을 해소할 탄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순실 사태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동력을 선사했다. 매 주말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장쾌한 촛불의 물결이 그것이다. 어제밤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1,000만 명이 들고 나선 촛불은 구체제 적폐 청산과 새로운 나라를 위한 변화와 개혁을 염원했다. 계층과 신분에 아랑곳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된 촛불은 심화된 양극화 해소와 패거리 진영 문화의 청산을 요구했다. 소수 엘리트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구체제 대신 시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공화정의 성립을 명령했다.
물론 장밋빛 희망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전국민의 95%, 촛불의 민심을 읽은 헌재가 탄핵소추를 인용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지만 구체제 온존을 획책하는 앙시앙 레짐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촛불에 대항해 같은 시각 덕수궁 앞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박사모 등 친박 세력의 시위에서 불길한 조짐이 읽히고 있다. 탄핵 직후 다가올 대선 국면에서 각 정파들이 벌일 것으로 보이는 이전투구는 정의로운 정권의 수립과 정반대 방향의 ‘빽도’를 걱정하게 만든다. 옥석이 가려지지 않고 뒤섞인 잡탕밥 리더십으로는 반듯한 국가 개조의 꿈은 일장춘몽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믿을 언덕은 촛불밖에 없다. 찢어지고 상처받은 민심을 아우르고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힘의 원천은 촛불이다. 각 정파가 권력쟁탈에 눈이 멀어 엇나간 이합집산의 길로 빠지려 할 때, 대청소 대상인 부패 세력이 그 틈을 타 정권의 한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고 회심을 미소를 지을 때, 가차없이 비판의 채찍을 날릴 수 있는 것은 촛불 뿐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의 총화로, 세계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촛불이야말로 이 나라를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 수 있는 견인차일 것이다.
정유년 아침 새롭게 맞이한 태양은 눈부시다. 그 태양의 기운을 받아 대한민국이 오욕의 늪에서 벗어나 희망찬 나라로 전진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