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느끼고 도전하라, '저녁이 있는 삶'이 오리라"

'홍콩수요저널' 손정호 편집장의 해외생활 도전기..."개인주의 문화 적응 어려웠지만 지금은 편해" / 김민정 기자

2017-02-03     취재기자 김민정

겉으론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삶이 치열한 도시, 홍콩. 그 곳에서는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이 숲을 이루고, 해가 지면 고층빌딩 숲에서 화려한 야경이 빛난다. 한때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픈 역사를 가졌지만, 홍콩은 동‧서양의 매력이 잘 어우러져 아시아의 관광 중심지이자 문화 허브다.

2000년대 초 20년 넘게 살아온 한국과 닮은 듯하면서도 또 완전히 다른 그 곳, 홍콩으로 건너가 자신의 꿈을 이루고 가정을 가져 삶을 뿌리내린 한국 사람이 있다. ‘홍콩수요저널’의 편집장 손정호(42) 씨다.

홍콩수요저널은 홍콩 한인 교민을 대상으로 1995년 3월 15일 발행을 시작한 한글판 주간 신문사다. 매주 수요일, 일반 신문의 절반 크기인 타블로이드판 사이즈로 20~24면, 3,000부를 발행한다. 홍콩 100여 곳에는 직접 배포하고, 1,000여 곳의 기업과 일반 독자에게는 우편으로 발송하고 있다. 홍콩을 방문하는 한인 여행객을 위한 관광정보나 한인 교민을 위한 기사가 주를 이룬다.

홍콩 대표 교민신문 홍콩수요저널의 편집장인 손정호 씨가 처음부터 홍콩에, 그리고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94학번인 그는 재학 당시 주변에서 소위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학업과 영상 제작에 열중했다. 성적이나 장학금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재미가 있어서’였다. 학교 안에서 미디어 관련 활동은 다 해본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학과 내 영상동아리 대표, 교내 언론사 영상팀장, 신문방송학과 영상조교 등의 일을 도맡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뿐 아니라 사진학과 사진수업, 신학과 음악수업, 연극영화학과 시나리오 수업까지 섭렵하며 자신만의 전공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대학시절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값지고 알찬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취업의 문턱에 서니 그간 해온 일들이 취업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토익이나 토플, 기타 자격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취업이 막막했던 그는 교내 평생교육원에서 주관하는 영어회화 수업을 수강했다. “토익 점수가 없으면 말로 할 수 있는 실용영어를 배우자”는 생각이었다.

당시 영어수업에서 만난 할머니 강사 레지나(Regina) 씨는 해외로 나가본 적 없던 부산 토박이 손 씨에게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 볼 것을 추천하고 용기를 주었다. 강좌 초기엔 그를 ‘Mr. Son’이라 불렀던 레지나 씨가 강좌가 끝날 쯤에는 ‘My Son’이라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은 친해졌다. 레지나 씨는 그에게 “해외로 나가 봐.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 말고, 네 눈으로 직접 해외를 보고, 냄새 맡아보고, 느껴 봐”라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기를 권유했다.

2001년 그는 국가보훈처와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청산리 구국대장정’ 대원으로 지원해 중국에 갈 기회를 얻었다. 독립운동가였던 김좌진 장군의 역사 현장을 따라가 보는 활동이었다. 구국대장정에 참여한 것을 기회로 그는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중국 땅을 밟아 보았고 백두산에 올랐다. 2주간의 여정이 끝난 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좋고 옳다고 생각한 것이 부산에만, 그리고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그는 내친김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친구 몇몇과 다시 의기투합해 홍콩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홍콩에서 여행 멤버들을 먼저 보낸 뒤 일주일간 홍콩과 마카오를 홀로 더 여행했다. 그렇게 여행을 다니며 홍콩 여행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한 홍콩인이 손 씨가 찍고 있는 영상이 궁금하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손 씨에게 영상이 완성되면 ‘야후 홍콩’에 올려 자신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은 VJ라는 단어로 잘 알려져 있는 원 맨 시스템(one man system)이 생소하던 2002년, 그렇게 야후 홍콩에 업로드 된 손 씨의 영상을 본 홍콩 현지의 한 건축 디자인 회사의 영상사업부가 그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정말 전부 혼자 만들었습니까?” 5분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혼자서 기획·촬영·편집까지 해낸 손 씨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들은 손 씨를 홍콩으로 스카우트했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흥미에 의한 부탁으로 올렸던 동영상 하나로, 그렇게 그와 홍콩의 인연이 시작됐다.

부푼 꿈을 안고 떠난 홍콩이었지만, 상황이 녹록지 만은 않았다. 그토록 좋아했던 영상 제작이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회사 업무가 재미있지 않아 결국 그는 1년이 안 돼서 회사를 나왔다. 당시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홍콩 현지 사람들과 일하면서 겪는 직장 문화였다. ‘단체’가 우선시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홍콩은 ‘개인’이 우선시됐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온 손 씨를 특별히 챙기는 사람도,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었다. 손 씨는 “공 들여 나를 홍콩까지 데려와 놓고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또한 그는 물 한 잔, 서류 한 장에도 모두 값을 매기는 홍콩 문화가 비인간적이고 융통성이 없다고 느꼈다. 한국에서는 ‘부탁한다’는 한 마디로 금방 해결될 일도 홍콩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홍콩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개인적이다, 협력하지 않는다, 텃세 부린다’는 편견은 ‘투명하다, 특정인을 편애하지 않는다, 순서에 맞게 일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어갔다. 손 씨는 지금 돌이켜 보면, 홍콩에 아는 사람도 한 명 없고 갓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던 10여 년 전의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홍콩의 개인주의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 이외의 것은 요구하지 않고, 개인의 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홍콩의 기업 분위기는 결과적으로는 14년 전 사회 초년생 손 씨에게 독이 아닌 약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끝나는 거구나, 여기서 뭘 더 해 줄 필요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훨씬 일하기가 수월해지더라고요.” 홍콩에 정착한 지 14년이 지난 지금, 처음엔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만큼 큰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홍콩 문화를 그는 지금은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홍콩에서의 ‘저녁이 있는 삶’이 지금은 만족스럽다”는 말을 전했다.

2003년, 그는 한국과는 다른 홍콩의 직장 문화에 적응이 힘들어서 홍콩에서의 첫 직장을 그만두고 한인 교회에서 봉사활동의 하나로 영상제작을 맡아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교회를 다니던 한인 사업가 한 분이 손 씨의 영상을 보고 실력이 좋다며 자신의 회사로 스카우트했다. 그렇게 손 씨는 2004년 봄, Jay&Soo International 전자회사의 영상사업부에 취직하면서 홍콩에서의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홍콩 현지 촬영대행, 기업 홍보비디오 제작, TV광고 제작 등의 업무를 맡으며 역량을 쌓아갔다. 자신을 스카우트했던 사장으로부터 홍콩의 직장 문화와 사회생활, 문화 전반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직장 생활이 4년차로 접어들던 해, 회사가 기울어 경영이 악화되자 손 씨는 그간 모은 돈으로 회사의 영상사업부만 따로 인수해 개인 영상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2008년, 사업 시작과 함께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는 기업들의 영상광고 발주를 줄였고 인터넷 사업도 하향세로 몰아갔다. 그는 계속 회사를 이끌어나가기에는 자신의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30대 중반에 마냥 백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홍콩생활을 준비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홍콩수요저널에서 새 편집장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고민 끝에 편집장 직에 지원했다. 졸업 이후로는 줄곧 영상을 제작해왔기 때문에 기사 작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대학시절 열정적으로 해냈던 전공 공부와 학생기자 시절의 기사 작성 능력을 살린 덕에 그는 편집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홍콩수요저널에 그가 가지고 있던 영상사업부를 합병시켜, 간간히 TV광고제작, 행사 촬영·중계 등의 사업도 담당하고 있다. 그는 홍콩수요저널에서 영상 제작과 기사 작성, 두 가지 일을 모두 할 수 있어 재미있다며 자신의 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 동안 결혼도 해서 이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그에게도 한 때 가장 큰 적은 ‘공허함’이었다. 자국에서는 마음이 흔들릴 때 가족이나 교수님, 선·후배,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해외에서 혼자 있을 때는 하나만 무너져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공허함을 느끼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이들에게 어디든 해외로 나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도전해 것을 권한다. 그는 “사고의 틀이 커지면 커졌지, 절대 줄어들진 않을 거예요. 나도 스펙 없고, 지방대 나왔고, 연줄 없이 홍콩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자리잡은 평범한 케이스죠”라며, 좋았던 추억과 학창시절의 경험은 잠시 인생의 타임라인에 묻어 둔 채, 우리 젊은이들이 더 크고, 새롭고, 낯선 곳으로 떠나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겁내지 마라.” 대학생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 마디를 묻자 손 씨가 한 말이다. 그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앞으로 계속 할 수 있을 일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라며 “지금 당장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힘들고, 부끄러워도 시간 지나 뒤돌아보면 별 일 아니게 느껴집니다”라고 덧붙였다.

부산토박이 손정호 씨가 홍콩에서 자리 잡기까지에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선택한 용기, 우연히 찾아온 사소한 기회도 놓치지 않는 순간의 현명한 선택, 타지에서 외국인으로서 고독함과 싸우며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온 노력…. 이러한 것들이 현재 홍콩수요저널의 편집장, 손정호 씨를 만든 인생의 재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줄곧 ‘질문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답변하는 사람’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 과감하게 우물 밖으로 나와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나가는 ‘우물 밖 개구리’ 손정호 씨의 더 큰 미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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