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부부들의 마지막 선택 '졸혼', 조용하게 빠르게 확산
이혼 않고 별거, 또는 동거하면서 남남처럼..."나자신을 위한 삶 선택" 새 트렌드 형성 / 박영경 기자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박주현(55) 씨는 최근 아내의 발언 때문에 충격에 빠졌다. 박 씨의 아내가 ‘졸혼’을 선언한 것. 박 씨의 아내는 “이제 아이들도 모두 성인이 됐으니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며 박 씨에게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보자고 말했다.
졸혼(卒婚)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이혼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요즘 졸혼을 택하는 중년 부부가 느는 추세다. 자녀를 모두 키워놓은 후 부부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의 시간을 갖는다. 결혼을 졸업하고 그간 가족을 위해 투자하느라 제쳐놓았던 ‘나’를 돌보는 것이다.
졸혼은 노부부가 결혼 생활을 끝내는 황혼이혼과는 다른 개념이다. 졸혼은 한 집에 함께 살면서도 서로 간섭만 하지 않거나 별거해 따로 살며 가끔 만나는 형태로 나타난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므로 부부는 졸혼 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방송에서도 졸혼이 몇 차례 언급된 바 있다. 졸혼을 선택한 대표적인 연예인은 영화배우 백일섭. 그는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방송에서 본인이 졸혼했다고 밝혀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백 씨는 졸혼 이유에 대해 “함께 잘 살려면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내 성격이 그렇지 못했다”며 “노년을 서로 즐기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탤런트 강부자의 금혼식(결혼 50주년 기념식)이 화제가 되면서 백일섭의 졸혼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민영(27, 경기 수원시) 씨는 졸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부모님이 따로 산 지 꽤 됐다”며 “오히려 별거를 시작한 후 가끔 만나 외식할 때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좋다”고 말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부모님을 같이 만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은 그냥 두 분의 연애 때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마가현(22, 부산시 남구 용당동) 씨는 “엄마, 아빠가 서로 원하는 것이 달라 다툴 때가 많다”며 “동생이 성인이 되고 나면 부모님께 차라리 졸혼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 씨는 “결혼을 졸업하고 부모님 두 분 다 서로를 위한 삶을 가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모(52) 씨는 졸혼을 선택한 후 오히려 남편과 사이가 좋아졌다. 그는 두 자녀를 키워 놓고 혼자 지낼 시간이 필요하다며 남편을 설득해 별거를 시작했다. 김 씨의 남편은 처음에는 '결혼했는데 따로 사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졸혼을 반대하다 가정에 얽매여 우울해하는 아내를 보고 결국 졸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 씨는 “가족이 다 같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며 “같이 살 때는 서로 다 안다고 생각해 할 얘기가 별로 없었는데 따로 사니 안부도 묻고 오히려 대화를 많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의 남편도 “처음에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책임을 저버리는 것 같아 찜찜했지만 지금은 졸혼도 관계를 지켜내는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각에서는 졸혼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혼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싫어서 졸혼이라고 좋게 표현하는 게 아니냐”, “결혼해서 살면서도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는 등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일부 네티즌도 “따로 살아도 잘 지내면 졸혼이고 사이가 안 좋으면 그냥 별거하는 것이냐”며 졸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허모(49) 씨는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내 남편이 졸혼 이야기를 꺼내면 굉장히 섭섭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법률전문가들은 결혼의 의무를 들어 ‘졸혼’ 풍습에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결혼의 의무 중에는 ‘동거’ 항목이 있다. 별거는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경우에는 이혼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단기적으로는 관계 개선을 위한 방법은 될 수 있겠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