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가 가야할 길은 멀다

/ 칼럼니스트 박창희

2017-06-18     칼럼니스트 박창희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대 왕국은 가야라고 한다. 신라나 고구려가 아니라서 의외기는 하다. 이는 불행하게도, 일본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해 세계에 퍼뜨린 ‘임나일본부설’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은 4~6세기 고대 왜(倭) 정권이 200여 년 간 한반도 남부 가야(임나, 任那)를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어용 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인 양 주장했다. 그들은 가야를 ‘가라(加羅)’라 적은 <일본서기>의 과장·윤색된 기록을 근거로 가라(임나)에 ‘일본부’가 들어서 식민지처럼 경영했다고 단정했다. 19세기 일본 내의 정한론과 20세기 초반 식민 전략도 알게 모르게 임나일본부설에 빨대를 꽂고 있다. 역사 해석의 무서움이다.

국내의 가야사 연구는 이 ‘임나일본부설’을 비판·반박하는 데서 출발했다. 식민사학의 트라우마 속에서 비판도 쉽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문헌 사료가 빈약한 가야사는 1980~90년대 김해와 함안, 고령 등지의 가야 유적지에서 거둔 놀라운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자기 말’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 자료 앞에 임나일본부설도 꼬리를 감추는 양상이었다. 그 결과, 요즘은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대놓고 주장하는 학자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잔흔이 깨끗이 걷힌 건 아니다.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한국 학계에는 알게 모르게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식민사관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식민 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이다. 서울대 이병도를 필두로 한 그 스승의 그 제자들은 실증사학이란 서구의 방법론을 앞세워 대학 강단을 쥐락펴락했다.

식민사관을 둘러싼 국내 강단-재야 사학계의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고구려를 집어삼키려 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을 중심으로한 재야 사학계가 ‘민족사학’을 부르짖으면서 식민사학 논쟁은 핫이슈로 부각됐다. 이른바 민족사학계는 ‘식민사학해체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켜 논쟁을 공론화 했고, 이는 국회에서도 이슈로 떠올랐다. 강단 사학계는 이를 ‘유사 역사학’이란 딱지를 붙여 공격했고, 그 중심에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있다고 지적했다. 도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되자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도 의원의 역사관을 문제삼고 나섰다.

식민사학 논쟁은 가야사 복원과도 연관이 있다. 가야사를 괴롭히는 임나일본부설의 잔흔 위에 식민사학의 더께가 얹혀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 안팎은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논란에 빠져들어 있다.

이런 미묘한 시점에, 문재인 대통령은 ‘뜬금없이’ 가야사의 연구·복원을 지시했다. ‘뜬금’은 시중에 ‘떠 있는 돈’이다. 곧 시세의 변동에 따라 정해지는 값인데, 그게 없다고 했으니 갑작스럽고 좀 엉뚱하긴 하다. 그렇더라도, 가야사가 입은 상처와 홀대를 생각하면 ‘뜬금’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가야사의 온전한 복원은 민족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요, 일제의 역사 왜곡과 농단에 대처하는 일이다. 정상적 상황이라면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는 크게 보아 박수 받을 일이다. 문제는 이런 미묘한 시기에 뜬금없이 지시로 ‘정치의 역사 개입’ 논란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그렇잖아도 역사학계는 물론 국민들은 ‘박근혜표 국정 교과서’에 크게 데인 터다.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가 방법상, 시점상 적절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방적 ‘지시’가 아니라, 학계의 의견을 듣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가야사의 중요성을 거론하고 연구 협조 요청을 했더라면 뜻하지 않은 논란으로 번졌을까 싶다. 지금이라도 학계의 찬반 의견을 듣고 소모적 갈등이 아닌 생산적 작업으로 유도하는 정교한 리더십이 필요해 보인다.

가야사는 ‘문제적’ 고대사다. 문헌 사료는 빈약하지만, 유적이나 유물로 보면 ‘삼국’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는다. 가야의 시공간은 문헌상 최소 500년, 고고학 자료상 700년까지 확장된다. 수로왕, 허왕후, 장유화상, 정견모주, 우륵, 무력, 김유신 등 흥미로운 인물이 많고, 토기와 철기, 공예품, 위세품은 물론 지역별 스토리텔링 거리가 풍부하다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다. 복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가야를 제4의 제국으로 끌어올려 온전한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은, 역사 바로세우기이자 영남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최근 연구 결과 가야권이 영남지역에 머물지않고, 섬진강 주변과 광양, 순천만, 남원과 금강 상류까지 들어온다니, 고대사를 공통분모로 한 지역 통합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가야사 복원은 결코 간단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 기반을 조성하고 미진한 발굴조사를 벌여 학술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20명 정도에 불과한 우리 가야사 연구자의 인력과 역량을 강화해야 일도 시급하다. 예산 따먹기식 지자체의 경쟁도 지양해야 한다. 지난 2000~2004년 1차 가야사 복원 사업때 무려 1290억 원이 투입되었지만, 남은 건 지역 개발과 유적지 복원이 대부분이었다. 또다시 ‘가야사를 이용했다’는 비판을 듣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야는 영남의 근원이다. 가야의 정체성은 곧 영남의 혼과 뿌리에 닿아 있다. 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한국 사람의 1/3이 가야인의 후손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이름만으로 가야는 이야깃거리다. 문헌에는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拘邪), 임나(任那) 등 다양한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해 여러 형태로 쓰인 때문으로 해석되지만, 그만큼 신라, 백제, 왜 같은 인접국과의 교섭·교류가 활발했다는 반증이다. 이 땅에 신라리, 백제동, 고구려 마을은 없어도 가야동, 가야리는 곳곳에 산재한다. 그건 잊혀져온 가야를 잊지 않으려는 민중들의 집단 기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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