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원세훈, 그리고 김모 양... 엽기적인, 너무나 엽기적인 사람들
/ 논설주간 강성보
전지현, 차태현 주연의 로맨틱 코메디 영화 <엽기적인 그녀> 덕분인지 요즘은 ‘엽기적’이란 말이 때로는 친근하고 유머스런 이미지로도 자주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단어다. ‘엽기적인 광기’, ‘엽기적인 폭력’, ‘엽기적인 살인’ 등 ‘엽기적’ 그 다음에 따라오는 단어가 과격하고, 잔인한 행동을 이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옛날 국어사전에서 ‘엽기(獵奇)’를 찾아보면 “비상식적이고 괴이하며 그로테스크한 일에 흥미를 느끼는 것”으로 돼 있다. 요즘 현대어 사전에는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상식을 뒤엎는 기발한 것”이란 제2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을 듯 싶다.
지난3월 ‘엽기적인’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사회 이슈 점유율 면에서 ‘대박’을 치고 있는 순간 사회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인천 초등학생 살해 사건’은 그야말로 고전적 의미의 ‘엽기적 사건’이었다. 불과 17세밖에 안된 소녀가 8세짜리 초등학생을 꾀어 자신의 아파트에 데리고가 목졸라 죽이고 흉기로 시신을 토막낸 뒤 대형 쓰레기 봉투에 담아 아파트 물탱크에 버렸다. “나이어린 소녀가 그렇게 잔인한 짓을!” 듣는 이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할 만큼 충격적이고 섬뜩한 사건이었다. 만일 최순실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신문 방송의 사회면 뉴스를 독점했을 것이다.
피의자 김모 양은 경찰 조사에서 “사람의 살을 베어 그 단면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범행 당일 집에서 ‘살인’과 ‘엽기’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다고 한다. 현재 인천지법에서 재판이 진행중인데 김 양의 가족과 12명으로 구성된 호화 변호인단은 김 양이 미성년자이며,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워 형량 최소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피해자 부모는 법정에서 “철모르는 내 아이를 그렇게 죽이다니”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아이가 그렇게 졸라댔는데도 (위치 추적이 가능한) 핸드폰을 사주지 못해 그런 일을 당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며 울먹여 방청객들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사건의 전말을 보도한 신문을 보면서 8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발생한 ‘파팽 자매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프랑스 뿐 아니라 온 유럽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1933년 2월 어느날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 도시 르망의 한 주택가. 이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던 크리스틴 파팽, 레아 파팽 자매는 남자 주인이 출타한 틈을 타서 여자 주인과 그 딸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하기 시작한다. 우선 맨손으로 모녀의 눈알을 파내 계단에 던졌다. 또 망치와 양철 물병으로 때리고 부엌칼로 마구 찔러 결국 모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나서 파팽 자매는 자신들의 몸을 씻은 뒤 나이트 가운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범행 은폐 시도도 하지 않고 경찰에 순순히 체포됐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거실은 푸줏간 고기처럼 난도질당한 모녀의 사체 토막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계단에 던져진 피해자 모녀의 눈알은 아직 시신경이 살아 있었다고 한다.
언론의 폭발적인 관심 속에 왜 그런 엽기적인 살인을 저질렀는가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다. 부르조아 가정 주인과 하녀 간의 계급 갈등, 파팽 자매의 근친상간, 비정상적 동성애 관계 등이 제기됐다. 오랜 재판 과정 끝에 결국 둘다 정신분열증 환자로 인정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언니 크리스틴은 몇 년 뒤 병원에서 숨졌지만, 동생 레아는 출소 후 호텔 청소부 등의 잡일을 하며 2000년까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하녀들>, <잔혹과 매혹> 등 각종 문학 작품에 모티프를 제공했으며 샤르트르, 시몬느 보봐르, 라캉, 장주네 등 유럽 최고 지성들의 인간 탐구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 파팽 자매 살인사건과 지금 한국의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은 유사한 점이 많다. 눈알을 산 채로 파내거나 사체를 토막내는 등 행위 그 자체가 엽기적이란 점이 그렇고, 살인을 하고 난 뒤 경찰에서나 법정에서 태연할 수 있다는 담대함이 그렇다. 또 범행이 범인의 정신 병력과 관계있다는 점도 두 사건의 공통분모 중 하나다. 초등생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 김 양은 조현병(정신분열)으로 치료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부터 우울증과 환청, 불안 증세를 앓아왔다는 것이다. 최근까지 병원에서 조현병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은 것이 확인됐다.
김 양의 변호인단은 김 양이 법적인 미성년자이고 정신 병력이 있음을 내세워 감형과 정신병원 수용형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김 양의 범행을 조현병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찮다고 지적한다. 조현병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감정 조절이 안돼 범행도 즉흥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특징이 있는데 사전 준비가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김 양의 범행 행태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 양은 조현병 환자가 아니라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나온 렉터 박사처럼 싸이코패스(반사회적 성격 장애)라는 것이 몇몇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이다. 법원이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미지수지만 피해자 부모를 비롯한 일반인들은 “그런 엽기적인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고 몇 년 뒤 정신병원에서 나와 사회생활을 다시 하는 범인을 이 사회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느냐”며 항변하고 있다.
그런 고전적 의미의 ‘엽기’는 아니지만 우리는 최근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상식을 뒤집는” 엽기적인 인물 몇 명을 목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물난리 중 외유를 질타하는 국민들을 향해 레밍(들쥐)떼 같자고 일갈한 충북도 의회 김학철 의원이다. 그는 중도 귀국 후 “기자 인터뷰 도중 말 실수했다”며 크게 고개 숙이고 사과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터무니 없는 해명글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김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1만 2000자가 넘는 장문의 글을 통해 “(외유단을 비판한) 국민들이 여학생 리더십 캠프를 난도질했다”고 말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표현이다. 국민들이 비난한 것은 국민을 레밍에 비유한 천박함이지 여학생의 리더십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인데, 그는 논리에도 안맞는 엉뚱한 말을 뇌까렸다. 게다가 그는 “레밍이란 말 듣고 기분 나쁘시죠? 그럼 레밍 되지 마십시오”라며 국민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더 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인이 되기로 작심하고 마지막으로 속에 있는 말 마구잡이로 끄집어 내 터트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국민들 속을 저렇게 긁어대는 막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싶다. 정말 엽기적이란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엽기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그의 사고방식과 내뱉는 말 속에서 정신병에 가까운 엽기성을 느끼는 것은 나만은 아닐 듯 싶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녹취록 속 발언도 엽기에 가깝다. 선거에 개입하고 언론을 통제하려 기도하면서 “말 안들으면 줘 패야 한다”고 국정원 간부들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민주화된 개명천지 세상에서 어떻게 저런 상식 밖의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하기사 이명박 정부가 서울시 부시장 출신인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했을 당시 기자실에선 ‘사상 최대의 엽기 인사’란 말이 나돌았다. 국정원장 자리는 외교와 국방에 정통해야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원 전 원장은 행정공무원밖에 경륜이 없었다. 국가를 수호하기보다 이명박 정권을 수호하는데 급급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는데, 역시 그랬다는 사실이 이번 그의 녹취록에서 밝혀진 셈이다. 이 역시 정말 엽기적이다.
로맨스 코메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남친에게 자신의 하이힐을 신기고 뛰어다니게 만드는 등 상식을 뒤집는 행동으로 관객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했다. 요즘 정가의 엽기적인 인물들 역시 상식을 뒤집는 행동을 한 것은 맞는데 웃음과 재미 대신 분노와 한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니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