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판사 랜덤하우스는 작년 연간 실적 보고서를 통해 E. L. 제임스가 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3부작이 2012년 3월 미국에서 첫 출간된 뒤에 7000만부가 팔렸다고 밝혔다. 비밀스러운 과거를 가진 27세의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1세의 아니스타샤 스틸의 사랑을 파격적인 성애 묘사로 그려낸 이 작품은 ‘엄마를 위한 포르노’라는 평과 함께 이처럼 폭발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이 3부작의 가장 큰 특징이자 여타의 로맨스 소설과 차별화를 두는 점은 작품 전면에 BDSM(결박, 훈육, 사도마조히즘)을 내세웠다는 데에 있다. ‘금욕적이며 매우 잘생긴’ CEO 크리스천 그레이는 아나스타샤 스틸을 처음 본 자리에서 그녀의 순종적인 모습에 반해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실상 그레이는 어렸을 때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상대방을 때리고 고통을 주는 과정을 통해서만 쾌락을 느끼는 사디스트(가학 성애자)였던 것. 작품은 남자 친구의 그릇된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그의 트라우마를 치료하여 마침내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 여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3류 포르노 소설, 혹은 21세기의 새로운 로맨스 소설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이 3부작의 작가인 E. L. 제임스는 스테파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을 읽고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작가의 전 직업이 텔레비전 방송국 간부라는 사실은 이 소설의 문학적 평가와 무관하게 거둔 글로벌한 상업적 성공의 힌트가 될 법하다.
순진한 여대생이 젊고 잘 생기고 부자지만 가학 성애자(소설에서 묘사되었듯,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크리스천’이다)에게 맞으면서 쾌락을 느끼는 내용의 이 소설에 대해 혹자는 "21세기의 여성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알파우먼으로써의 역할에 지쳤다. 이 소설은 낭만과 강한 남성상에 대한 욕구를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남성성에 순종하고 보호받고자 하는 내면의 여성성을 충족시킨다"며, 21세기의 페미니즘에 맞는 콘텐츠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저런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엔 이 소설은 BDSM에 대한 묘사를 제외하고는 로맨스 소설의 클리셰를 지나치게 남용했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계의 핫 이슈 중 하나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영화화라고 한다. 성인 여성층이라는 타깃이 한정된 책과 달리, 영화는 더 대중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같은 로맨스 장르로 공전의 히트를 한 ‘트와일라잇’만큼 흥행할 수 있을지의 여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