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400만 돌파 '군함도', 한국식 영화와 일본식 문화유산의 차이

/ 편집위원 이처문

2017-07-31     편집위원 이처문

영화 <군함도>가 ‘스크린 독과점’ 논란 속에서도 개봉 닷새 만에 누적 관객 400만 명을 돌파했다. 산케이신문 등 일본의 극우 성향 언론은 ‘날조된 거짓’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창작물’ 등으로 폄훼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흥미진진한 탈출극’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일 뿐’이라는 따가운 지적도 나오고 있다. “생각보다 덜 슬펐고, 덜 아팠고, 덜 분노했다”는 한 네티즌의 혹평과 함께 “과거에 대한 아픔이 없고, 일본인조차 감동시키는 호소력이 없다”는 모 교수의 통렬한 비판도 뒤따른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에게 감상을 물었더니 역시 반응이 엇갈렸다.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지난 주말 <군함도>를 관람했다.

영화를 본 나의 평가는 ‘재미있다’였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이 이뤄진 군함도(하시마섬. 端島)라는 배경, 그리고 그 시대에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고된 삶을 이어갔던 조선인들의 실상을 대탈출이라는 콘셉트로 흥미진진하게 그린 영화였다. 1940년대 해저 탄광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했고, 황정민과 아역 김수안, 그리고 이정현의 탄탄한 연기력도 돋보였다. 영화에 문외한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제작비 220억 원을 들인 영화가 이 것밖에 안 되나” 하는 일각의 비판이 나에겐 설득력 있게 와 닿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두 가지 의문이 일었다. 하나는 일본의 강박적 행태요, 또 하나는 한국 내 강박적 반응이다.

먼저 일본의 행태. 왜 일본은 아직도 전쟁 범죄와 청산되지 않은 어두운 과거사 앞에서 머뭇거릴까. 왜 과거사 얘기만 나오면 정면으로 마주치지 못한 채 손사래를 치며 외면할까. 모르긴 해도 사무라이 정신이 몸에 뱄다는 일본이 실은 과거를 직시할 용기가 부족한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침략 전쟁을 떠받친 군국주의 그림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871년 11월. 일본 메이지 신정부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전권대사로 하는 48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보낸다. 서구의 문물을 배우기 위한 이른바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이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12개국을 차례로 방문한다. 무려 20개월간 선진국 방문을 통해 얻은 결론은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반드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것. 왕 지아펑 등 중국학자 7명이 공동 집필한 <대국굴기>에 따르면, 당시 사절단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1873년 3월 독일을 방문한 자리에서 철혈 재상 에두아르트 에로폴트 비스마르크를 만나 한 눈에 매료된다. “어떻게 하면 작은 국가가 강국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오쿠보의 질문에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조언한다.

“현재 세계 각국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교류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국은 소국을 얕보고, 강국은 약소국을 업신여기고 있다. 만국의 공법이 세계 각국의 권익을 보호해 준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강국에게 유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이 주권을 지켜내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프로이센(독일)은 국력을 키워 대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국민들의 애국심과 오랜 노력으로 이제 그 꿈을 조금씩 이루고 있다.”

오쿠보는 일본으로 돌아와 비스마르크의 조언을 실행하기 위해 ‘식산흥업건백서(殖産興業建白書)’를 제출한다. 이른바 신산업 육성 정책이다. 오쿠보의 정책은 정부가 나서서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군수 산업 중심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자금 축적은 세금과 공채 발행 외에 이웃 국가들을 침략해 자금을 획득하는 방법이 유용하다고 했다. 침략 전쟁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메이지 유신에서 싹을 틔웠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그룹은 대부분 봉건 무사 출신이어서 사무라이 정신은 자연스럽게 이들을 통해 계승 발전됐다. ‘유신3걸’로 일컬어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비롯해 50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마스가타 마사요시(宋方正義) 등도 옛 사무라이 출신이었다. 다이쇼(大正)시대의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 가토 다카키(加藤高明), 쇼와(昭和)시대 군부 파쇼의 우두머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도 모두 무사족 출신이다.

일본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이웃 나라를 침략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함으로써 일본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침략사를 부인하는 것은 일본의 정체성을 부인하는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들이 과거사에 왜 그렇게 예민한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2015년 7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섬 ‘군함도’는 일본 제국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덮을 수 있는 호재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군함도는 문화유산 등재 후 관광객들이 몰려 배편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의 관광 명소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 그런데 한국에서 만든 영화 한편이 ‘고춧가루’를 뿌리고 나섰으니 일본으로선 참을 수 없는 일일 터.

일본의 계몽주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찍이 탈아입구(脱亜入毆), 즉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와 교류해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스마르크를 본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 결과는 부흥이 아니라 침략 전쟁으로 점철된 군국주의 광기와 제국의 패망이었다. 비스마르크를 벤치마킹했던 일본은 정작 폴란드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같은 나라의 빌리 블란트 총리는 여태 외면하고 있다.

국내에서 일고 있는 <군함도> 논란도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다양한 생각, 다른 의견들이 서로 자유롭게 터져 나오는 모습은 다원주의 사회로 다가선 대한민국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을 놓고 강박에 가까운 ‘뭔가’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다원주의와 거리가 멀다.

최근 자전 에세이 <수인>을 펴낸 소설가 황석영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에 겐자부로가 나에게 ‘서사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난 당신이 부럽다’고 했을 때 ‘나는 당신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어요. 정치적 압박만 억압이 되는 게 아니라, 역사라는 엄처시하(嚴妻侍下), ‘너는 이걸 반드시 해야 해, 넌 이것만 해’ 하고 은연 중에 압박하는 것도 자유에 대한 억압이지요. 예술 하는 사람은 정치나 조직하는 사람들하고 달라서 역사에 눌리는 것도 억압이 돼요.” 마치 <군함도>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군함도>라는 영화는 최소한 이런 식은 돼야 해’라는 억압 또한 멀리해야 할 폐단이다.

어쨌거나 <군함도>는 조선인 강제징용의 아픈 역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게 한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문화유산을 거쳐 관광 명소로 변신한 군함도가 한국에서는 한일 과거사 문제로 부각됐으니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영화가 앞으로도 계속 나와 일본의 양심을 쉼 없이 찌를 때 비로소 과거사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군함도>가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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