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단거리 미사일은 북미 대화 신호탄?...문재인 정부, 남북대화 소신껏 준비해야
/ 편집위원 이처문
지난 주말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서 몇 가지 변화가 읽혔다. 우선 미사일 사거리가 250㎞로 짧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북한의 의도가 담겨있다. “괌이나 미국 본토에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는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논평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우리 정부의 반응도 비교적 무덤덤하다. 이번 미사일 발사는 오는 31일까지 계속되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습에 대한 북한의 맞대응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백령도와 대연평도 점령 훈련 장면을 방송으로 내보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번 도발이 미국이 아닌 남한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북한의 속내라 하겠다.
미국의 대북 유화적 태도는 최근 수뇌부의 발언에서도 포착된다. 해리 해리스 미국 태평양사령관은 지난주 “외교적 수단을 가장 먼저 사용해야 한다”며 북한과의 대화를 암시하는 듯한 얘기를 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역시 “북한이 (유엔 안보리 제재 통과 이후) 도발을 자제한 것에 만족한다”며 “가까운 장래에 대화로 가는 길을 보는 신호의 시작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비슷한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통일부 업무 보고 자리에서 “엄동설한에도 봄은 반드시 온다”며 “씨 뿌릴 준비를 착실하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북한 핵과 미사일로 한반도의 긴장이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남북관계 재개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문인 듯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남북 대화’ 이슈는 별로 매력이 없다. 반면 ‘안보 이슈’는 잘 먹혀든다. 선거때도 그랬다. 지난 보수 정권이 남북 대화를 ‘북한 퍼주기’로 낙인찍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좁아든 탓도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대화에 두드러기를 보이는 정치권 일각의 태도는 위기 상황 대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물론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긴 하다. 하지만 긴장 완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변국 설득 작업을 한다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 ‘남북대화’ 운을 떼는 자체가 대화를 유도하는 전술이기도 하다.
강경파가 협상파를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몰아붙일 때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1938년의 ‘뮌헨회담’이다. 그해 9월 29일 뮌헨으로 날아간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독일 총통 히틀러를 만나 체코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는 협정을 체결한다. 히틀러의 불가침 약속을 믿고 전략적 요충지를 내준 것이다.
뮌헨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서명한 협정서를 흔들어 보이며 “우리 시대에 평화가 왔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1년 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짧은 평화는 깨어지고 만다.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이끌어낸 평화는 무책임한 양보와 맞바꾼 일시적 평화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전혀 다른 시각이 있다. 김연철 교수는 <협상의 전략>에서 체임벌린을 재평가한다. 짧은 평화였지만 체임벌린 덕분에 영국이 시간을 벌어 2차 대전 때 독일의 공세에 버틸 수 있었다고 진단한다. 뮌헨 회담의 실패가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체임벌린의 나약한 평화 지상주의 탓이라는 지적과 사뭇 다른 진단이다.
1936년 영국 외무부는 “영국의 재무장에는 최소 2년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히틀러의 야욕이 뻔히 보이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뮌헨 협상을 전후해 영국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레이더 기지 57개를 만들었다. 공군력도 1938년 이후 2년간 10배나 강화됐다. 900여개의 대피소도 만들었다. 뮌헨 협상으로 번 1년이란 기간이 결국 영국을 버티게 했다는 것이다.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은 ‘실패했지만 성공한 회담’으로 꼽힌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전략핵무기 50% 감축 등 상당 부분 합의를 이뤘지만 레이건이 전략방위구상(SDI)을 고수하는 바람에 막판에 틀어졌다. 하지만 군비 축소에 대한 상대방의 의지를 서로 확인한 결과 후속 협상은 쉽게 풀렸다.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워싱턴을 방문해 가진 정상회담에서 핵전력 폐기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흔히 냉전에서 미국이 소련을 이긴 것을 두고 레이건의 대소련 강경책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30년간 주미 소련대사를 역임한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레이건을 ‘준비된 협상가’로 재평가했다. 그는 “레이건이 강경책을 지속하면서 협상을 거부했다면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 역시 소련 내부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혀 시도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미 레이건은 소련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며 소련에 대한 자극을 최대한 자제했다. 협상의 틀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눈을 돌려 한반도로 가보자. 개성공단 폐쇄 이후 남북관계는 말 그대로 ‘단절의 시대’에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남긴 유산이라고 해봤자 북한에 대한 적대감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주 국방은 어떤가. 군의 자랑거리이던 K-9 자주포의 폭발사고로 도마에 올랐고, 걸핏하면 터져 나온 방산 비리가 안보 위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 어긋나는 전술핵 재배치 주장이 터져나오고, 술자리 안주감에 불과한 ‘북한 정권 붕괴론’이 대안으로 등장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에게 전쟁 외 가능한 수단이라곤 대화와 협상뿐이다. 그러니 전쟁을 반대한다면서 남북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지독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외교는 오직 대통령만이 풀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적대 관계이던 중국의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이뤄냈다. 봄이 오고 나서 씨 뿌릴 준비를 하면 늦다. 북한과의 대화를 체임벌린식 나약한 유화주의라거나, 이른바 ‘종북 좌파’의 퍼주기식 접근으로 몰아붙이는 한 ‘코리아 패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994년 9월 21일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문에 이런 조항이 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남북대화를 재개한다.’ 남북대화 재개조차 미국의 힘을 빌어야 하는 부끄러운 과거를 되풀이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