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농촌진흥청 방문: 농촌진흥청 설립과 유엔 FAO 특별기금사업에 참여하다

[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 장원호 박사

2017-09-10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16)-1 농촌진흥청 방문에서 계속:

결혼과 동시에 아내는 경북 농사원에 사표를 냈으나, 생각해 보니 사표를 너무 성급하게 낸 듯했습니다. 마침 내가 총무과 인사계 차석으로 일하고 있어서 인사계장과 총무과장에게 사정하여 아내를 본청 생활개선과로 간신히 복직 발령을 받게 했습니다. 둘이 함께 본청에 근무하면서도 우리는 저축은커녕 생활하기조차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은 정말 박봉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부부는 수원의 진흥청 소유 관사를 배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생 원흥이와 관사에서 함께 살기로 했으며, 원흥이는 수원에서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1961년 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지금까지 공무원 정원을 동결한 규정을 수정했습니다. 재건회의의 인력활용조사를 마친 후 지금까지 임시직으로 일하던 인원을 시험을 거쳐 정규직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도 4급 갑류인 행정주사로 2계급 승진했고, 고대 경영학과 3년 선배인 김병권 형, 그리고 채일식 형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농사원에서 농촌진흥청으로 승격시키는  ㅇ리나라 농업 발전에 힉기적이고 역사적인 일을 주관한 3총사가 되었습니다.

위스컨신에서 농업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서울대 농대에서 강의했던 고 정남규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농촌지도소 165개를 세우고 우리나라 농업혁명을 위한 기초 작업을 할 때, 우리 세 명은 그 우리나라 농촌혁명의 실무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제공하다가 차관으로 바꿔주기로 정책을 변경했는데, 이것의 기초가 된 법안이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였으며, 이 법에 의한 차관을 AID 차관이라 했습니다. 서울, 인천, 부산 등지에 AID 아파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AID 차관으로 조성된 아파트들이었습니다. 나는 인사계에서 새로운 농촌진흥청 기구개편안을 정부의 내각 사무처에 제출하고, 이에 따른 예산 편성은 김병권, 채일식 두 분이 맡아서 하는 등 우리는 수원보다 서울에 근무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기구 개편과 더불어 3000여 명의 신규 농업 연구 지도직 채용 시험도 내가 주관하여 서울대 농대를 빌려 2일간 시험을 치렀습니다. 정치과를 나온 내가 농촌진흥청 설립, 농촌지도원 선발 등 우리나라 농업 기술 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지금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명권자인 청장에게 자세한 설명 없이 나의 아내가 복직된 사실을 청장은 못마땅해했고, 같은 건물 안에서 부부가 같이 근무하는 것도 무슨 큰 잘못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청장은 싫어했습니다. 농촌진흥청 기구 확장과 인원 확보 업무를 추진할 때 내가 정부의 내각 사무처에 살다시피 하며 세운 많은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농과대학 출신이 아닌 내가 농촌진흥청 내부에서 너무 설쳐서 농대 출신들의 빈축을 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나는 본청 총무과에서 식물환경연구소(나중에 농업 기술연구원으로 개칭됨) 서무과로 밀려났습니다.

농촌진흥청 구내에 있으면서도 본관에서 50m쯤 떨어진 다른 빌딩에 있는 이 연구소는 토양, 비료, 병리, 곤충에 대한 기본 연구 사업을 진행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토양의 권위자인 오왕근 박사가 과장으로 있었고, 비료와 농약에 관한 관리 업무는 일본의 ‘도토리 농대'를 나와 일제 때부터 농림부에 근무한 김영섭 박사가 소장으로서 책임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연구소로 전근된 이유는 당시 우리 정부가 유엔 특별기금사업을 신청하고 있었는데 영어 잘하는 사무직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에 특별한 관심과 소질이 있었는지 영어 만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유엔 특별기금사업이란 개발도상국의 농업 발전을 위한 기본 사업을 유엔 기금으로 도와주는 사업으로, 유엔의 FAO(Foods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국제식량농업기구)가 주관이 되어 기술자, 기계 등을 지원하고, 해당 국가는 국내 사업에 필요한 인원과 제반 시설 및 사업 비용을 부담하는 형태로 이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특별 회계로 이와 같은 사업을 지원했습니다.

농촌진흥청은 식물환경연구소의 오왕근 박사가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토질조사 프로젝트'와 '토양 비옥도 향상 프로젝트' 두 개를 유엔 FAO에 신청하고 있어서, 나는 이 사업 운영계획서를 FAO 직원과 한국 정부를 대표해서 작성해야 했습니다. 기술적인 것은 이미 합의가 되었지만, 마지막 예산 부분에서 우리는 유엔으로부터 한 푼이라도 더 가져오려고 했고, 유엔은 한국이 부담하는 비용을 한 푼이라도 더 내라고 주장할 때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우리나라 달러 환율이 일정하지 못할 때여서 달러 환차에 따라서 국내 비용이 늘거나 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만, 1963년에 이르러 아주 어려운 합의를 이끌어내고 유엔과 한국 정부 간의 특별기금사업이 조인되었습니다. 나는 토질 비옥도 프로젝트의 한국 측 행정관 및 지출관이었으며, 직급은 서기관이었습니다.  

1963년 당시 전체 공무원은 넥타이도 매지 못했고 요정 출입도 금지되는 등 군사정부로부터 공무원들 기강 감시가 험한 세상이었음에도, 나는 유엔 직원과 같이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사업이 사작되자, FAO에서 프로젝트 책임자인 조지 베르마트(George Vermaat)라는 네덜란드 토양 학자가 왔고, 통계 전문가로는 인도 출신 프라사드(Prasad)가 왔으며, 사무직원으로는 인도계 아가르왈라(Agarwala)라는 FAO 직원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모든 행정을 영어로 했고, 문서도 영어로 작성했으며, 자금 지출용 수표도 영어로 서명하는 사무를 시작한 것입니다. (16)-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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