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이 뜨고 있다. 이순신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임진왜란 전적지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한다. 그런데 거북선 잔해 같은 임란 유적이 발견된 적이 있을까? 남해 바다 어딘가에 뭍여 있을 것 같은 거북선을 찾으러 관계 당국이 수십 년을 뒤졌지만, 거북선 흔적은 아직 역사 속에만 있다.
2005년, 부산 동래구 수안동을 지나는 지하철 수안역 공사 중, 조선 전기 때의 동래읍성 해자(垓字)가 발견됐다. 해자(垓字)는 성 외곽에 땅을 파고 그곳에 물이 흐르게 한 도랑 형태로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이다. 동래읍성 해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것이라 역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발굴이 진행되자, 이번에는 동래읍성 해자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많은 무기와 유골들이 출토됐다. 임진왜란 유적이 발굴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도시철도공사는 이 희귀하고 소중한 임진왜란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우기로 했다. 그 위치는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안. 이렇게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란 이름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하철 역 안 박물관이 2011년 1월 28일 문을 열었다.
지하철 역 입구 계단을 따라 수안역으로 내려가면, 마치 성문 모양의 아치형 입구가 대합실 출구를 이루고 있다. 입구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대합실 입구부터 한쪽 벽면에 발굴 당시의 사진들과 몇 가지 유물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을 보며 대합실 안으로 걸어가면, 우리는 대합실 한편에 자리잡은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 가면, 정면에는 동래읍성의 외벽과 건물을 축소해 놓은 동래읍성 모형이 자리 잡고 있다. 동래읍성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이 잦은 부산포를 지키고자 쌓아올린 성으로 임진왜란 당시에 성이 함락됐으나, 1731년 영조 때 지금의 1.9km 둘레의 동래읍성으로 복원됐다.
동래읍성 축소 모형의 왼쪽에는 박물관 한편에 마련된 영상실이 있다. 이 영상은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읍성 전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장면을 영화 <명량>에서 실감하고 있다. 동래읍성 전투도 아마 그에 못지않았으리라. 2014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시절에 초인적인 리더십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구한 이순신 신드롬에 휩싸여 있다. 동래읍성의 치열한 전투 장면은 불현 듯 관람객의 애국심을 불 지핀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가 우리나라에 침입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서울도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달포 안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왜군이 점령하고 말았다. 그때 조선이 반격에 나섰다. 의병과 승려군도 나섰다.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이 이순신의 지략으로 왜군의 바다 보급로를 차단했다. 왜의 의도가 명나라 침공에 있음을 간파한 명이 조선을 지원하면서, 다시 전세는 역전됐다. 그리고 이순신과 권율 같은 명장들이 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 1592년 왜군들이 막 한반도에 닿아 부산진성을 공격했고, 조선 군사와 백성들이 막아섰지만 부산진성이 함락됐다. 뒤이어 왜군들은 동래읍성으로 치달아 왔고,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는 나무푯말을 세워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고 쓴 팻말을 마주 세워 일본에 맞섰다. 왜군의 조총을 우리 군사와 백성들은 맨손, 낫, 기와로 맞섰으나, 결국 성벽은 허물어 졌다. 임진왜란 초기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동래읍성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 조선의 민심을 흔들었고, 이것이 전국 의병들이 들고 일어난 계기였다. 당시 산화한 송상현 부사의 넋을 기려 부산시는 최근 부산 부전동 부근에 조성된 공원을 ‘송상현 공원'이라 명명했다.
영상실 오른쪽에는 임진왜란과 동래읍성 전투 상황이 적혀 있다. 그리고 동래읍성 모형의 뒤쪽 벽면에는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에는 당시 조선군이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며 사용한 여러 종류의 무기와 무구(武具)가 있다. 큰칼, 쇠손칼, 활과 화살, 장군전(화살의 일종) 촉 뿐만 아니라 비늘갑옷과 투구, 창 등이 있다. 유물로나마 왜군에 저항한 용감한 조선 백성의 혼이 전해온다. <명량>의 용감한 백성들의 모습은 허구의 영화였으나, 이 유물들은 사실의 증거들이다.
박물관 안 오른쪽 벽면에는 공사 당시 발견된 동래읍성의 해자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서 보존해 놓았다. 해자는 동래읍성 성벽에서 약 30m 전방에 폭 5m, 높이 1.7m~2.5m 정도의 돌과 흙으로 건축됐다. 해자안에는 원래 물이 있었지만, 전시된 해자 바닥에는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조선 백성이 분명한, 머리에 구멍 난 해골과 칼, 목궁, 화살촉 등이 있다. 1608년 동래부사였던 이안눌의 <동래맹하유감(東來孟夏有感)>은 “송상현 부사를 쫓아 성 가운데로 모여 들어온 백성들이 동시에 피바다를 이루고, 쌓인 시체 밑에 몸을 던져 백 명 천 명에 한두 명이 살아 남았다...온 가족이 죽어서 곡해줄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양산군수의 아들이 송상현 부사와 함께 순절한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읍성에 가보니 성 가득히 시체가 쌓여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온 고을 사람 모두가 순사하였을 듯하다. 이 같은 시체들이 해자에 던져졌으니,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의 처절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회사원 김모(26, 부산시 동래구) 씨는 역이 세워지고 처음 방문했을 때 다른 지하철역과 분위기가 달랐음을 느꼈다. 그는 “처음엔 지하철역 안에 해골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저 신기했지만, 왜군과 싸우다 순직한 분들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고 말했다.
군사와 백성들이 왜군에 맞서 싸울 때 사용한 무기들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큰 스크린을 앞에 두고 조종 버튼을 누르면 무기들이 화면에 발사되는 장면이 보인다. 100발을 동시에 연속적으로 쏠 수 있는 다연장 로켓 발사기인 ‘화차’를 이용해 사람들은 시물레이션 게임도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직장인 이현화(32,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씨는 종종 아이들과 박물관에 놀러온다. 아이들이 무기 체험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박물관이 지하철 안에 있다보니 친숙한 느낌이 들어 애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을 나와 지하철을 타러가는 개찰구 앞에도 해자의 단면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승강장 앞에는 임진왜란 때의 역사 그림들이 벽에 전시돼 있다. 동래부사가 왜의 사신을 맞이하러 가는 행렬과 의례 장면을 묘사한 10폭 병풍인 ‘동래부사접왜사도’, 동래읍성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지역 각처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그린 ‘임진전라도’ 등이 그것들이다.
주부 박지영(38, 부산시 수영구) 씨는 “4호선 수안역은 처음 와본다.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렇게 우연히 지하철 안 박물관을 통해 역사를 배우게 할 수 있어 의미 있는 지하철역 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부산박물관에서 운영을 맡고 있으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매년 1월 1일, 명절,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바쁘게 뛰고 걷는 지하철역 안에서 임진왜란 당시 선조들의 애국심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