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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고등학교 입학식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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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고등학교 입학식 날
  • 편집위원 양혜승
  • 승인 2015.03.02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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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로서 맞이하는 딸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중학교 입학식, 그때마다 기분이 모두 달랐다. 이번엔 참으로 오묘하다. 자녀가 성장해서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당연히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진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함께 밀려온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이라는 것이 가지는 단순명료하고도 혹독한 의미 때문이리라. 대학 진학을 위해 모든 것이 유보되는 시간, 고등학교 3년. 며칠 전 딸아이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최근 부쩍 말수가 적어진 딸아이의 고민을 들어볼 요량이었다. 딸아이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공부를 염려하고 있었다. 여태껏 과외나 학원을 한 번도 다니지 않고서도 소위 자기주도학습으로 최상위권을 지켜온 아이였다. 하지만 주변의 대부분 친구들이 중학교 때 이미 고등학교 수학 선행학습을 마친 상황인지라 상대적으로 뒤떨어질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겨울방학 들어 고등학교 수학공부를 시작했는데 너무 늦었다는 조바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딸아이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이 슬펐다. 딸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늘 그래왔듯 다시금 딸아이에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다독거려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들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라 부탁했다. 삶에는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늘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버지로서 늘 반복하는 레퍼토리였다. 자녀교육과 관련해선 나름대로 소신을 지켜왔다고 믿었지만 그날따라 마음이 참 아팠다. 우리 부부는 고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남매를 키우며 여태껏 과외나 학원에 보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애들이 파김치가 되어 사는 모습이 너무 싫다. 부모와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과외나 학원에 시간을 뺏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믿는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나들이도 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 믿는다. 공부의 목적은 삶을 배우는 것에 있다고 본다. 공부라는 과정을 통해 끈기와 집중력을 배우고 해결능력과 자신감을 배우는 것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결과가 좋으면 더욱 좋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 자체에 있다고 자녀들에게 늘 강조해왔다. 성적 때문에 혼을 낸 적은 없다. 심지어 중학교 3학년이던 딸아이가 볼멘소리를 한 적이 있다. 왜 다른 부모들처럼 일등을 하라며 닦달하지 않느냐고. 과외나 학원을 보내지 않는다 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럼 집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것 아니냐고. 딸아이에게 한 번도 공부를 가르쳐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아이만 수학공부를 내가 조금 도와준다. 방학이 되면 2주 정도 다음 학기 수학공부를 봐준다. 그것이 전부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자녀교육에 대해 주변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친한 친구들마저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녀교육에서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우리 가정만 뒤로 역주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는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차라리 침묵하고 만다. 괜히 말을 꺼내봤자 득보다는 실이 더 많고 공감보다는 상처가 남는다. 날이 갈수록 깨닫는다. 한국사회에서 정치, 종교, 교육을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것은 사람을 잃기에 딱 좋은 일이다. 몇 년 전인가 두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박물관 몇 곳을 둘러보러 갔다. 겸사겸사 서울에 사는 친구 가족과 잠시 동행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그 친구는 우리 부부가 자녀의 공부에 극성인 사람들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당시의 박물관 나들이는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식’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교과서 밖 상식이 많은 사람이길 원한다. 밤마다 아이들과 함께 뉴스를 시청하는 것을 즐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친구의 오해와는 달리 사실 내가 극성을 피우고 싶은 구석은 다른 데 있다. 교과서나 문제집보다는 주변의 삶에 눈길을 더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지난 여름방학 때에는 학교 봉사점수를 다 채운 딸아이를 설득해서 동네 복지관의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참여시켰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할머니들의 말벗을 해드리고 식사를 돕는 일주일짜리 프로그램이었다. 주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소위 ‘밀어주면’ 더 잘 될 애를 방치하는 것은 아니냐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딸아이의 공부를 밀어주고 싶지는 않다. 밀어주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는 기회들을 향해 떠밀고 싶다. 물론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지금도 딸아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을 제시해줄 수는 없다. 나의 답과 딸아이의 답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사람마다 같은 답을 갖고 있을 리가 없다. 단지 딸아이의 곁에서 그 고민을 함께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인 나 스스로도 잘은 모른다. 그것이 ‘극성’인지 ‘방치’인지.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좋다. 이것만은 알려주고 싶다. 무엇이 될 것인지만 죽어라고 고민하는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남들 보기에 버젓한 대학과 직장을 가는 것이 공부의 목표가 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는 세상에서,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남들의 잣대에 나의 인생을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의 삶을, 그리고 주변의 삶들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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