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지하철 1호선 토성역 6번 출구로 나오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감천문화마을 밑에 위치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나온다. 비석이란 말이 들어간 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무엇일까?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성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부산으로 온 피난민들은 부산역, 중앙동, 남포동을 중심으로 피난촌을 꾸려나갔다. 피난민들이 넘치자, 아미동 일대에도 피난민들이 밀려들었는데,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이 지역에서, 피난민들은 움막을 지어 나갔고, 집지을 마땅한 자재가 없던 당시에 공동묘지의 비석들이 건축자재로 사용됐다. 비석과 상석들이 축대, 담장, 계단을 만드는 자재로 쓰였다. 현재에도 아미동 일대의 담장과 계단에는 비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석마을 입구인 감천고개에는 길이 15m, 높이 6m의 비석문화마을 마을지도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을지도에는 탐방로 코스와 문화학습관, 기찻집 예술체험장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 마을 입구 일대에는 길이 26m의 디자인 벽화가 그려져 있고, 벽화를 따라 내려오면 비석문화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 안내판을 따라 가면,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골목 바닥에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 방문객들은 헤매지 않고 쉽게 골목을 다닐 수 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과 한 명의 사람이 들어가기도 비좁은 골목에서 마을 주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50여 년을 마을에서 살아 온 강명석(76) 할머니는 옛날에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마을이라고 했다. 또 밤이 되면 비석 틈에서 일본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강 씨 할머니는 “마을이 개발되기 전에는 자식들이 집에 오면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개발 후에는 밝아진 마의 사진을 찍어가며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집에 오는 것을 반가워한다”고 말했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비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보인다. 골목을 따라 좀 더 가면, 비석이 박힌 담장도 찾을 수 있다. 비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마을 도로 확장 후 길도 넓어지고, 주말이 되면 관광객들로 마을버스가 북적인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자주 찾아온다. 강 할머니는 “산동네 마을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고맙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비석마을을 방문한 대학생 이준열(24, 부산시 남구 대연동) 씨는 “비석으로 인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골목 담벼락마다 그려져 있는 벽화와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가 오싹함을 사라지게 했다”고 말했다.
골목을 나오면 온전한 무덤 위에 지어진 건축물이 보인다. 이 건축물은 지난해 부산 서구청이 도로 확장 공사를 진행하다가 발견됐다. 이 건축물은 온전한 모양을 유지한 무덤 위에 건축물이 서 있는 상태로는 처음 발견된 집이었다. 서구청은 이 묘지 위 건축물이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보고 보존하기로 했다고 한다.
비석마을에는 전망쉼터도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남포동이 한눈에 보이고 부산의 남북항은 물론 용두산, 자갈치 등 부산 도심 전체와 바다가 보여 멋진 경관을 이룬다.
감천문화마을에 왔다가 비석문화마을을 발견하고 이곳을 찾은 대학생 박지은(22,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씨는 “비석문화마을이 감천문화마을에 비해 방문객이 적은 것 같고 아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비석을 보니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옛날의 아픈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아픈 역사를 지닌 아미동은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중 하나인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탐방로 조성’을 통해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마을에서 밝은 분위기의 마을로 바뀌었다. 또 감천문화마을과 인접해있어 많은 방문객 유치를 기대하고 있다.
부산 서구청 관계자는 “현재 아미동과 토성동 등 도시재생계획사업을 구상 중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내용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