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엊그제로 ‘촛불 집회 1주년’이 지났다. ‘촛불 집회’는 지난해 10월 29일 청계광장에서 3만 개의 촛불이 켜진 것을 시작으로 해를 넘겨 23차례에 걸쳐 연인원 170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1주년을 기념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난 시간을 반추하고 있다. 언론 매체에서도 ‘촛불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제 새벽 네이버 검색창에 ‘촛불’이라고 쳐 보았더니 뉴스 항목에만도 무려 57만 5076개의 글이 떠 있었다. 가히 촛불의 홍수라 할만하다.
어떤 글들은 당시의 일지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고, 어떤 글들은 당시의 감격을 격정적인 어조로 되새기고 있었으며, 또 어떤 글들은 그 촛불의 의미를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혹은 촛불의 의미가 실종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도 있는가 하면, 촛불의 공로를 특정 세력이 독점하고 있지 않느냐는 경계의 글도 눈에 띄었다.
이 많은 글들이 통신선을 통해 내 컴퓨터에 저장돼 있다 생각하니 좀 질리는 기분이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으면 어떤 의미에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기억의 회로에 저장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쎄, 이 숱한 글 속에서 내 글 하나 더 보탠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기야 다르게 생각하면 글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연인원이 1700만 명이라면 적어도 수백 만 명은 집회에 참석했을 터이고, 그렇다면 ‘촛불 혁명’은 그 수백만 개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인 지층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맥과 같은 서사시가 아닌가 말이다.
어쨌든 그 때를 되돌아보면 겨우 한 해 전의 일인데도 시간의 피안에서 일어난 일인 듯 아득하다. 나 자신 그 집회에 너덧 차례는 참가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지난 1년 한국 사회가 격동했기 때문일 터이다.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발견된 이후, 촛불집회가 가을과 겨울을 넘겨 끈질기게 이어졌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이 선고됐고,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됐고,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새 정권이 들어섰고……. 아, 그 와중에 태극기 집회도 있었다.
어쨌거나 촛불은 일단은 성공했다. 민주 공화정이라는, 지난 7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온갖 풍상과 곡절을 겪으며 합의하고, 성취했다고 믿었던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공리가 무참하게 훼손된 사태에 분노했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부패하고 위법적인 대통령을 권좌에서 쫒아내고 감옥에 보냈지 않았던가. 그리고 평화롭고 질서 있는 선거 끝에 새 대통령을 뽑았지 않았던가. 그때, 우리는 거리를 행진하며 이런 노래를 되풀이 불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이제는 좀 차분하게 ‘촛불’이 가진 원래의 의미로 반추하고 싶기도 하다. 가능하면 정치적 함의를 좀 탈색시켜 가면서 촛불이 가진 일상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2.
내 기억 속의 ‘촛불’은 대여섯 살 유년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시쳇말로 처세에 무능했달까 출세와 담을 쌓았달까, 경남 일대의 시골학교로만 2~3년 걸러 전근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고달픈 이삿짐을 싸야 했던 터다.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던 나는 당연히 친구가 없을 수밖에.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책읽기에 과도하게 탐닉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여섯 살 때, 그러니까 미취학 때 가덕도에서 살았을 무렵이다. 지금이야 부산에 편입돼 가덕대교로 연결돼 육지화된 지 오래고, 투기 자본들의 등쌀에 반쯤 도시화됐지만 60년대 중반엔 하루에 서너 번 오가는 나룻배가 그 섬과 육지를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때다. 당연히 전기도 없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보기 어려울 때였다. 초가집 관사의 조명 수단 역시 호롱불이나 촛불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던 그 시절, 학력은 높지 않았지만 책읽기를 즐겨하고 입담이 좋으셨던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뉘어놓고 옛날이야기를 해 주셨다. 주로 한국의 민담들이었는데 가끔 서양의 동화도 들려주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레퍼토리엔 장화홍련전, 콩쥐팥쥐 이야기, 욕심 많은 스님 이야기, 그리고 알리바바 이야기나 알라딘 이야기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희고도 길쭉한 하얀 양초에서 노랗게 타는 불꽃이 일렁거리며 방안을 감싸 주던 그 밤의 기억은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밝음과 어둠이 부드럽게 뒤섞여 만들어낸 어스름……. 그리고 촉광 낮은 부드러움에 감싸여 듣던 어머니의 옛 이야기. 글쎄, 지금 생각하면 그 유년은 꿈과 몽환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후일,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그 때의 기억을 어떤 이의 책에서 다시 되살린 적이 있다. 프랑스의 과학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의 <촛불의 미학>이란 책이다. 알다시피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바슐라르는 젊은 시절 우체국에 근무하는 한편, 독학으로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 이미지론으로도 유명하다는 것, ‘4원소(属性)’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을 발전시켰다는 것, 그래서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백과사전의 소개다. 어쨌거나 나는 <촛불의 미학>의 독자로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 시절 나는 그의 책 여러 군데서 매혹적인 구절을 발견하고는 밑줄을 그었던 것 같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이다.
"그렇다, 커다란 사물 하나하나에는 몽환적인 개성이 있다. 고독한 불꽃은 난로 속의 불과는 다른 몽환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다. 장황한 불 앞에서의 인간은 장작이 타는 것을 거들어줄 수도 있고, 또 필요한 때 장작을 더 넣을 수도 있다. 따뜻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행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소규모의 프로메테우스적 행위를 여러 모로 수정하고 거기에서 완벽한 불을 쑤석거리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글쎄, 문학이란 것은 사물 하나하나의 몽환적인 개성을 촛불처럼 깨워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유년 시절의 내 어머니야말로 옛날이야기란 방식으로 사물 속에 숨어 있는 몽환적 개성을 내게 일깨워 준 프로메테우스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구절도 있다.
"꿈과 추억의 명암에서 중심적 그림을 보자. 몽상가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있다. 그는 자신의 다락방 속에 있다. 그는 촛불을 켠다. 그는 양초를 켠다. 그리하여 나는 추억하고 나는 나를 되찾는다. 나는 몽상가라는 밤샘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연구하듯이 연구한다. 그에게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세계는 촛불의 불꽃이 비추는 어려운 책이다. 왜냐하면 고독의 동반자인 촛불은 특히 고독한 작업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촛불은 빈 독방을 밝히는 게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밝힌다."
삶은 팍팍한 현실이 아니라 촛불이 밝혀준 따뜻한 몽상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추억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촛불은 세계라는 어려운 책을 밝혀주는 인식과 명상의 도구라는 것, 그게 바슐라르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아, 이런 대목도 떠오른다.
"(촛불의) 불꽃은 인간에게 있어서만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꽃의 몽상가가 불꽃을 향해 중얼거리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때에 그는 시인인 것이다. 촛불은 질량을 가지지 않은 존재이면서 더욱 강한 존재이다. 철학자는 그의 촛불을 앞에 놓고 자기가 작렬하는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글쎄, ‘촛불 집회’의 최초의 기획자가 바슐라르의 이 대목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촛불의 불꽃은 하나의 세계라는 것, 촛불은 질량을 가지지 않은 존재이면서 더욱 강한 존재라는 것,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의 증인이라는 것. 글쎄 2016년 가을과 겨울의 한국 시민들은 질량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강한 존재인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무게 없는 무게’로 강력하고 견고한 권력을 결국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그것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그 겨울 거리에 모여 한 뼘의 어둠 밖에는 밀어낼 수 없는 작은 촛불 하나로 권력의 탐욕과 적폐를 쫒아내려던 시민들을 ‘불꽃의 몽상가’라 부를 수도 있겠다. 아니, 작렬하는 세계의 증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그 작은 촛불이 하나하나가 모여, 수백 만 개가 되고 그리하여 광화문 광장과 서면거리, 충장로를 환하게 밝혔던 것이겠지. 하고 보면, 그때 우리 모두는 ‘촛불의 철학자’가 아니었던가.
3.
올해 초여름 나는 연극연출가 이윤택 선생과 ‘광장’과 ‘촛불’에 대해서 장시간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도요’라는 이름의 문학 무크지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꾸는 멋진 신세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그 대담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지난해 10월 이래 지금 한국 사회는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들이 거대한 저항의 물결을 일으켜 부패한 정권과 수구적인 지배세력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의 질서를 다시 고쳐 세우는 놀라운 광경의 연속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같은 시민 궐기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이러한 촛불 시위로 상징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광장에서 다양한 새로운 문화적 움직임을 태동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광장은 새로운 시대의 문화 형식을 태동하는 장이 시작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갖습니다.”
이윤택 선생은 이렇게 화답했다.
“이번에 일어난 촛불 집회를 두고 실제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이나 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경이로운 기적이라고 합니다. 지금 21세기 지구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시민의 엄청난 물결로 광장이 뒤덮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 21세기는 더욱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어떤 공동적인 시선, 공동적인 행동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미국이나 일본은 더욱 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곳에서 시민들의 광장 물결이 자발적 동기로 모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지식인이나 학생 계층이 아니고 바로 소시민이라 불렸던,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던 소시민들이 스스로 ‘소’자를 떼어내고 광장으로 나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자발적 시민성은 비폭력적이었다는 것이지요. 폭력과 투쟁과 저항의 광장이 아니고 자발적인 참여와 비폭력적 저항, 그러한 평화적인 의식의 혁명이 1700만 명이라고 하는, 지금 지구상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참여로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이죠. 그래서 이 기적적인 시민성의 부활을 명예로운 혁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윤택 선생의 말 대로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연속을 시민계급에 의한 ‘명예혁명’으로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근대화 논리로 무장된 군부세력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민중민주세력의 운동논리가 아닌 새로운 시민계급에 의한 제3의 물결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게다. 그렇게 보면 시민 하나하나가 촛불을 밝히고 모여든 ‘광장’은 근 60년 전 최인훈의 ‘광장’의 패배를 극복하는 희망과 평화의 공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 대담의 말미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유쾌하게(?) 합의했다.
정치가를 포함해서 지식인들이 스스로 자기 의자를 박차고 내려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실천 운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 권위와 독선을 풀고 이제는 광장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낮은 자리에서 시민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4.
‘촛불 집회’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오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더러 이야기를 해 보라면 이렇게 요약하겠다.
첫째로, ‘촛불’은 민주공화정의 훼손 사태에 분노한 국민들이 궐기해 21세기형 한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은 사건이라는 것. 1987년 6·10 시민항쟁은 박정희·전두환의 군부독재를 항복시키고 외형적인 민주화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결과물이었던 이른바 ‘87체제’는 사실은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 지난 30년의 경험으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이제는 단순히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서서 경제·복지·문화·안보와 통일담론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영역의 민주화로 이행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국민 전반에게 보편화시킨 계기가 바로 ‘촛불’이었다는 것.
두 번째, ‘촛불’은 시민계급을 재발견하게 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는 것. 일상에 순응하고 매몰된 시민들이 이른바 자발적으로 거리에 모여든 것은 한국 사회가 처음 겪은 사태(?)가 아니었던가. 하고보면, 4·19나 6·10도 당시로선 지식인 그룹이었던 학생이 중심이 돼 일어나 시민들이 가세하는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평범한 일상인들이 스스로 광장에 모여 축제 같은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는 것. 그래서 사회 전 분야의 일상적 민주화를 이끌 주체 세력이 바로 ‘시민’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재확인했다는 것.
세 번째, ‘촛불’은 법을 넘어선 정의를 실현하는 기폭제가 됐다는 것. 지금 속속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그 숱한 적폐들이 다시금 지난 시대의 야만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 은폐, 블랙리스트, 국정원과 군의 정치공작 등등은 우리 사회의 정의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직선 대통령이 법을 빙자해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던가. 다르게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의 정의는 법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될 터이다. 그렇게 본다면 ‘촛불’은 우리에게 법 너머의 정의를 실현할 것을 촉구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본의 법칙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내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시대 악법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차별주의로부터 고통 받는 소수자들,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듬는 윤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윤리를 만들어내면서 우리 공동체의 울타리를 넓혀 갈 사람은 시민인 우리 자신일 터이다.
5.
다시 서두에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이 글에서 ‘촛불’의 의미를 현실정치에서 한발 비껴나 짚어보려고 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십 만 개의 글과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를, 어릴 적의 기억을 주절거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치 이야기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를 정상화하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은 미우나 고우나 ‘정치’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그 새로운 정치도, 새로운 윤리의 영역도 결국은 꿈꾸는 자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꿈꾸는 멋진 신세계’는 누가 만드는가. 결국은 우리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바슐라르 식으로 ‘몽상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멋진 신세계는 어떤 이들이 되풀이해 외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 줄 휘황찬란하고 눈부신 기술혁명이 아니라, 나와 내 이웃의 따뜻한 일상에서 시작돼야 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어느새 만추이다. 곧 세모가 다가오겠다. 오래 전에 나는 어떤 신문에서 세모를 앞두고 촛불 이야기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세모는 아직 멀었지만 또 다른 촛불 이야기이니 칼럼의 일부를 되풀이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기로 하자.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이마의 주름살이 조금씩 깊어진 만큼,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방울진 만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꿔왔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노여워도 하며 열심히 살아온, 낯모르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참으로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아마 내년에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이 우리를 찾아오겠지요.
세모의 마지막 밤, 가장들은 조금 일찍 귀가해서 소박한 만찬을 앞에 하고 가족들과 둘러 앉으십시오. 그리고 촛불을 켜세요. 낮은 불빛에 부드럽게 떠오르는 가족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보십시오. 지난 한 해 열심히 살아온 삶을 자축하십시오. 그리고 아기의 잇몸에서 돋아나는 고운 이처럼 우리를 찾아올 새 날의 희망을 함께 나누십시오. 올 한해 열심히 살아온 동시대의 여러분들께 문득 시 한 편을 선물로 바치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삣쭈삣 흩날리는/진눈깨비는 되지 말자/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사람이 사는 마을/가장 낮은 곳으로/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새 살이 되자(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