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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던 '배트걸'로 사직구장을 뛰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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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던 '배트걸'로 사직구장을 뛰어보니
  • 취재기자 최위지
  • 승인 2014.05.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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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 줍고, 로진백 나르고, 진땀 흘린 하루, 그래도 가슴 가득 보람
부산 사직야구장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노래방이다. 롯데 자이언츠 팀 홈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다. 요즘 롯데 성적이 시원찮아 관중 숫자가 이전보다 줄었지만  그래도 열혈 팬들이 우렁차게 외치는 함성과 목청 높게 합창하는 응원가는 여전히 사직 구장을 뜨겁게 달군다. 사직구장에는 선수들이 펼치는 스릴 넘치는 경기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공수교대 시간 등 시합 틈틈히 늘씬한 몸애의 치어리더들이 음악에 맞춰 추는 화끈한 율동은 관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그뿐 아니다.  '볼보이'처럼 경기 보조 요원인 '배트걸'도 남성팬들에게는 심심치 않은 눈요기 거리다.  하의실종이라 할만큼 허벅지가 노출되는 짧은 바지 차림에 귀여운 얼굴의 배트걸. 최근 치어리더들의 춤동작에 따라 몸을 흔드는 한 배트걸의 동영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배트걸은 야구장에서 양념 같은 존재라고 할까. 배트걸의 주임무는 타자들이 공을 치고 나서 타석 부근에 내던지고 간 배트를 회수해 오는 것이다. 때로는 경기에 사용될 공을 주심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투수가 손에 바르는 송진가루인 로진 백을 마운드에 갖다주는 일도 한다. 롯데 자이언츠는 몇 년 전까지는 전속 배트걸을 뒀지만, 현재는 소속 치어리더들이 돌아가며 배트걸을 맡고 있다. 나는 사직구장을 자주 찾는데, 갈 때마다 배트걸 한 번 해봤으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팬이라 할 만큼 좋아하는 강민호 선수를 가까이서 보고 그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이 됐다.  지인으로부터 지난 8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LG전의 일일 배트걸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그 경기의 당번 배트걸이 개인 사정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하루 임시 '땜빵'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즉시 "오케이" 하고 사직으로 내달렸다. 구장에 도착하자 롯데자이언츠 응원단 실장이 나를 반겼다. 그의 안내를 받아 일반 관중은 출입할 수 없는 게이트를 통해 구장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배트걸 의상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교육을 받기 위해 응원단이 사용하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치어리더들이 응원도구와 복장을 챙기고 메이크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이벤트를 기획하는 롯데 영상팀은 촬영 내용을 논의하고 장비를 챙기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얼핏 엿들으니, 경기 중 ‘댄스타임’이나 ‘키스타임’ 이벤트를 할 때 상대편 유니폼을 입은 관중은 찍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춤추는 사람을 찍으면 안 된다는 말도 들렸다. 전광판에 비쳐지는 영상들이 바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기장 이면의 대기실은 이처럼 바쁘게 뛰고 있는 스텝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그날 날씨가 아직 쌀쌀해 내가 받은 배트걸 의상은  롯데자이언츠 로고가 새겨진 긴팔 야구점퍼와 짧은 반바지였다.  배트걸의 트레이드 마크인 헬멧도 착용했다. 배트걸은 1루와 3루에 각각 1명 씩 배치되는데, 나는 1루 배트걸을 맡게 됐다. 1루 배트걸은 주심에게 공을 나르는 일도 함께 해야 하므로 공 바구니를 별도로 챙겨야 했다. 3루 배트걸을 맡은 김민아(22) 씨도 나처럼 생전 처음 그라운드를 밟아본다고 했다. 그녀는 “그라운드에 나서니 가슴이 정말 두근거린다. 오늘 경기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 해내야 하는데, 걱정된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흥분도 되고 걱정도 됐다. 그래서 가슴이 콩딱콩딱 뛰었다. 우리 두 배트걸은 응원단 실장을 따라 관계자들이 이용하는 복잡한 통로를 통해 그라운드에 나갔다. 배트걸은 각각 1루와 3루 덕 아웃 바로 옆 공간에서 대기한다. 배트걸은 흔히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고 불린다. 경기장 안에는 배트걸 말고 ‘볼보이’도 있다. 볼보이들은 빠르고 강하게 날아오는 공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순발력 있는 남자들의 몫이다. 야구 경기에 발랄한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홈 쪽 그라운드에는 배트걸이 자리잡고, 외야 쪽 그라운드 공처리는 볼보이가 해결한다. 배트걸과 볼보이는 야구장의 동업자다. 노련해 보이는 볼보이가 기자에게 다가와 간단한 교육을 실시했다. 고참 볼보이의 설명에 우리들 신참 배트걸은 다소곳이 귀를 귀울였다.  교육이 끝난 뒤 야구공과 로진 백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내가 꿈에도 그렸던 강민호 선수가 다가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그는 "로진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것 같았다. 강 선수는 멍하니 서있는 나를 흘낏 보더니 직접 로진을 꺼내 가면서 “이게 로진이에요”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잠깐 한숨을 돌리는 순간, 야구장 관계자인 듯한 분이 “배트걸은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해야 경기에 방해가 안 돼”라고 핀잔을 주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배트걸은 생각보다 분주했다. 주심이 손가락으로 모자라는 공 개수를 표시하면, 배트걸은 재빨리 공 바구니를 들고 그 개수의 공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주심을 계속 주시해야 했다. 이 날 롯데는 점수를 잘 내지 못했다. 타석에 서는 롯데 선수들의 숫자도 적었다. 그래서 나는 배트를 줍는 일보다는 주심에게 공을 나르는 횟수가 훨씬 많았다. 주심에게 전달하는 야구공은 모두 새 것이다. 볼보이는 한번 쓴 공이나 파울로 굴러 나온 공들은 따로 모아두었다가 중고등학교 야구부에 기증한다고 귀띔한다. 한 경기에 쓰이는 그 많은 공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었는데, 그때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배트걸은 타자가 타격한 후 던져 놓은 배트를 주워 재빨리 돌아와 롯데 팀 덕아웃 배트꽂이에 꽂아두어야 한다. 타자들은 배트 만이 아니고 팔꿈치나 발등 프로텍터 등 그라운드에 남겨 놓은 장비들이 많다. 배트걸은 그것들도 모두 수거해서 덕아웃에 갖다 주어야 한다. 그래서 배트걸은 선수 주변을 맴돌게 된다. 그런데 선수들은 배트걸과 잘 눈을 맞추지 않는다. 말을 걸지도 않는다. 나중에 치어리더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한 치어리더는 “치어리더나 배트걸은 선수들과 내외 아닌 내외를 한다. 절대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알듯말듯 묘한 불문율이 배트걸과 선수들 사이에 있었다. 일종의 직업윤리인가? 아무튼 재밌는 현상이었다.
▲ 배트를 줍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가는 기자의 모습이 '전국 방송'을 탔다(출처: SBS Sports).
다음 차례인 타자들은 배트걸이 대기하는 곳 바로 앞에 마련된 하얀색 원 안(next better's box)에서 스윙 연습을 했다. 그래서 기자는 선수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지만, 자칫 잘못하다 타자가 휘두르는 배트에 부상을 당할 듯하여 그 원을 약간 돌아서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타순이 많이 남았는데도 항상 미리 나와 대기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경기 상황을 보면서 자기 타순 직전에 맞춰 스윙하는 선수도 있었다. 선수들의 습관은 제각각이었다. 야구장은 매우 소란스럽기 때문에, 배트걸들이 주심의 공 달라는 신호를 못 보거나 파울 볼이 날아와도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라운드에 나와 있는 경기 관계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희귀한 소리를 낸다. 그 것은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서 내는 소리인데, 시끄러워도 귀에 쏙 들어온다. 처음에 그 생소한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귀에 쏙쏙 들어와, 관계자들이 부를 때마다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었다. 7회 경기장 클리닝 타임에 투수 마운드로 나가 새 로진을 갖다 놓고 다 쓴 로진을 가지고 왔다. 그 때 볼보이가 다가와 새 야구공들을 주면서 주심 외에는 아무에게도 주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하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듯했다. 내가 그 야구공들을 지키고 있는데, 또 강민호 선수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볼보이가 주고 간 그 야구공을 달라고 했다. 다른 선수들은 처음 보는 배트걸을 본 척도 하지 않는데, 강 선수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심판 외에는 공을 주면 안 된다는 볼보이의 당부를 들었던 터라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내 뒤에 서있던 한 관계자가 강 선수에게 공을 꺼내 던져주었다. 어설픈 배트걸 덕분에 강민호 선수가 조금 답답했을 듯했다. 이 날 경기 초반에는 롯데가 기선을 제압했지만, LG가 5회에 점수를 내면서 동점이 되었다. 계속해서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경기는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롯데 덕아웃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고, 타석에 오르는 선수들 표정은 밝지 못했다. 경기 개시 4시간이 넘어가자, 선수들을 비롯해 치어리더들과 배트걸들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라운드를 정리하는 남자 직원들도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직원들끼리 “내가 야구에 미쳐가지고…. 다시는 안한다 하면서 계속 온다”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이어졌지만,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했고, 끝내 그날 경기는 무승부로 마무리됐다. 장장 5시간 4분 동안의 승부였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 왔다. 몸이 천근 같았다. 그라운드를 왔다갔다 하는 일이 보통 중노동이 아니었다. 대기실에는 언론사 기자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오늘 서울 올라가기는 힘들겠고, 부산에 연고도 없는데, 잠은 어디서 자야하나?”하고 탄식했다. 나는 대기실에서 ‘롯데 여신’이라 불리는 박기량 치어리더 팀장과 마주쳤다. 그는 “평소보다 경기 시간이 길어져서 힘들었겠다. 수고 많았다”고 나와 다른 관계자들을 다독여주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각은 밤 11시 50분. 3루 배트걸 김 씨는 다리가 아프고 추웠지만 야구를 워낙 좋아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야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힘들어도 끝까지 즐겁게 맡은 일을 해낸다”고 말했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면 승부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라운드 안에서 시합을 보았다. 승부보다 선수와 심판의 숨소리를 들었고 구단과 경기자 관계자들의 땀을 보았다.  참으로 인상깊은, 영원히 잊지 못할 배트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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