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다보니 어린 학생들로부터도 "기자가 되려면 어떤 재능이 가장 중요한가요"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대부분 과제물이나 숙제를 하기 위해서이지만). 최근 기자들이 제역할을 못한다고 네티즌들로부터 ‘기레기’(기자와 쓰레기)로 불리고 언론 환경이 급속도로 변해 종합일간지 기자란 직업에 대한 회의가 큰데 여전히 ‘기자’를 꿈꾸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 고맙다.
언론인, 저널리스트,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민중의 지팡이, 제3의 칼 등등으로 불리지만 나는 기자는 국민과 대중들을 대신해 ‘질문하고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상대에 대해,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답을 잘 들어 정리하는 것이 기자의 역할이다.
훌륭한 질문은 훌륭한 답을 이끌어 낸다. 기자가 잘 물어보면 상대방은 제대로 된 답변을 하고 대중들은 그 사건이나 그 사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는다. 다른 글과 달리 신문이나 방송 기사는 화려한 기교나 개인의 감정보다는 팩트에 충실해야 하고 5W 1H를 지켜면 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면 마법처럼 좋은 답이 나온다. 세상과 역사를 바꾼 기사들은 문장력이 아니라 기자들의 세상에 던진 대한 질문에서 비롯됐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하는 질문을 들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무식한 내용, 혹은 자신이 얼마나 유식한지를 과시하는 피력증, 혹은 그 사람이나 사건과 아무 상관없는 핵심을 비켜난 질문을 하는 이들이 많다. 평소에도 질문하는 습관이 익숙해지지 않아서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그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하고 그와 관련한 내용과 자료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려면 평소 생각과 관심사가 많아야하고 신문, 책, 자료 등을 자주 접해 콘텐츠가 풍부해야 한다. 이제 신문보다 방송, 방송보다 인터넷의 영향이 커지면서 언론 환경이 급변하고 있지만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풍부한 컨텐츠를 보유해 균형감각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년 기자 시절에 가장 경이롭게 생각했던 언론인은 조갑제 선배다. 지금은 대표적인 보수 논객, 심지어 보수꼴통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현역 시절의 조갑제 기자는 매우 진보적 성향으로 마당, 월간조선 등 월간지에서 심층취재와 르포 기사의 획을 그은 분이다. 그 분은 기자시절에 항상 여행용 가방을 들고 다녔다. 자주 출장을 가서 그런 가방을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커다란 여행 가방에 기사와 관련된 자료를 잔뜩 넣고 다닌 거였다. 또 취재원만이 아니라 술집에서 여자종업원을 만나도 “고향이 어디냐,” “지금 사는 집은 전세냐 월세냐” 등등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질문을 해서 얻은 답변들이 결국 우리 사회의 목소리였고 시대의 요구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숱하게 던진 질문과 준비한 자료는 마치 풍성한 식자재같다. 재료가 많으면 근사한 음식을 만들기 쉽다.
80대 중반까지 현역 앵커로 활약 중인 바바라 월터즈는 인터뷰 상대가 정해지면 500여 개가 넘는 질문지를 만든다고 한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나”부터 “가장 마지막으로 울어본 적은 언제이고 무엇 때문에 울었나” 등등 다채롭다. 또 혼자 질문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그 사람한테 궁금한 것이 뭐야?”라며 자신이 생각치 못한 질문을 얻기도 한다.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는 힘, 즉 경청이다. 주변에서 보면 특종을 하는 기자들은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말도 눌변이고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줘서 그들로부터 진심어린 답변을 얻어내는 이들이다.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질문이나 현학적인 내용보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란 모습을 보이면 마음의 봉인이 풀려 진솔한 답을 쏟아낸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미국 CNN에서 <래리킹 라이브>를 진행한 래리 킹은 경청의 힘을 강조한다.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래리 킹보다 더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사람은 없다”고 극찬했다. 킹은 1957년 마이애미에서 방송에 데뷔한 이래 5만 명과 인터뷰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게 했다. 클린턴, 푸틴, 고르바초프 등 국가원수급 인사부터 마돈나, UFO 신봉자, 음모론자, 심령술사에 이르기까지 킹은 모든 분야의 인물을 만났다. 20세기 미국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자신이 학력도 낮고, 유태인이고 엄청난 바람둥이라는 것에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사람과 세상에 뜨거운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대중이라면 어떤 일이 궁금할까’를 대신 물었다. 그는 자서전 <원터풀 라이프>에서 “내가 잘 하는 일이라곤 그저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도 짧고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수소폭탄의 발명가인 에드워드 텔러 박사가 그의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텔러 박사는 그에게 물리학에 대해 얼마나 아냐고 물었고 래리 킹이 ‘전혀 모른다’고 하자 난감해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고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왜 물리학을 그렇게 싫어했을까요.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학은 왜 그리 어려울까요?”란 질문을 던지자 텔러 박사는 얼굴이 환해지며 이렇게 답했다. “잘못 가르쳐서 그래요. 물리학이란 교과목의 이름부터 바꿔야해여. 생활학이라고 불러야 해요. 물리학은 당신이 오늘 눈을 뜬 순간부터 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라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래리 킹은 물리학엔 문외한이면서도 그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맞장구치면서 유익하고 재미있는 인터뷰를 이끌어냈다. 그는 인터뷰나 평소 대화에서도 첫째 가는 법칙은 듣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준비와 연습, 열린 마음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말하기 비법은 듣기다. 사람은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듣는 척하기만큼 힘든 연기는 없다. 들으려면 대화 상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관심이 관심을 낳는다. 관심은 상호적이다. 또 그를 존경해야 한다. 관심과 존경, 이 두 가지 없이 대화에서 성공할 수 없다. 관심과 존경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누구든지 뭔가에 대해서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전문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다. 말하지 말고 들어야 배운다. 말한다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배울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나 역시 매주 <주간경향>에 <유인경이 만난 사람>이란 와이드 인터뷰 기사를 쓰고 있다. 매주 새로운 사람을 찾는 일보다 경이로운 것은 그 유명하고 바쁘고 잘난(?) 이들이 인터뷰를 하면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대단한 질문을 던진 것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없지만 난 그분들이 말을 하면 눈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어머’ ‘세상에’ ‘그러셨어요?’ 등 추임새를 넣어가며 경청모드를 보인다. 단단하게 봉인된 입이나 마음도 진심어린 경청 앞에 풀리는 것 같다.
이제 21세기인들은 호모헌드레드, 100세 인생을 살면서 7가지 직업을 거치면서 삶을 마감해야 한단다. 질문과 듣기는 꼭 기자가 아니라 그 어떤 직업을 수행하는데도 필요한 자질이다. 우리는 평소에 자신보다는 다른 이의 일상에 더 관심이 많고 남들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려 한다. 수시로 스스로에게 “지금 내 감정은 어떤 상태인가,” “내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이 일이 꼭 필요한 일인가” 등을 물으면 성공은 못해도 엄청난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 또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면 타인을 이해하며 공감력도 커지고 정보도 얻고 무엇보다 나의 든든한 친구와 응원군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인생 역시 우리가 던진 좋은 질문에 훌륭한 답을 선물한다고 믿는다.
*편집자 주: 필자는 경향신문 선임기자이자 유명 방송인으로 KBS <아침마당>, MBN <동치미> 등 TV프로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 <수다의 힘([email protected]>은 하루 수천 명이 방문하는 파워블로그이다. 그녀는 각종 일간지, 잡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며,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특강도 자주한다. <내인생 내가 연출한다>, <해피 먼데이>, <웬수들과 살기>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