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동안 기사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후학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하고 있지만, 흰 원고지를 대하면 여전히 가슴이 막막해진다. 독자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그냥 날밤을 지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장시간을 투입해 힘들여 정해진 분량의 원고지를 메웠는데, 그 다음날 아침 다시 읽어보니 영 아니다는 느낌이 들 경우 정말 낭패다. 마감 시간이 임박해 다시 쓰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남에게 읽히기 부끄러운 글을 그대로 내보내자니 내면의 자존감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과감하게 이미 쓴 원고를 휴지통에 내 팽개치는 편이다. 마감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엉터리 글을 내 이름으로 내보낼 수 없다는 지론에서다.
물론 글이 술술 잘 풀리는 날도 있다. 대충 리드 부분만 생각한 뒤 컴퓨터 글쓰기 판을 열었는데 자판을 두들기자 마자 미처 생각치도 않은 아이디어가 연속적으로 튀어나와 진도가 쭉쭉 나가는 것이다. 마치 내 뒤에서 누군가가 글 내용을 불러주고 나는 그것을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듯한 느낌이다. 과거 기자 시절 어떤 때는 200자 원고지 30장 분량을 불과 두어시간 만에 쓴 적도 있다. 이럴 때 옆에서 나의 글쓰기 작업을 본 동료 기자들은 “타자 연습하는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기사 자동판매기’란 별명도 들었다. 주문만 하면 기사가 툭 튀어나온다는 뜻에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그런 속필의 행운은 좀체 나타나지 않는다. 대부분 낑낑대고 원고를 메운다. 최근 몇 군데 매체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정규 언론은 아니고 회사 사보나 동창회 회보 등이다. 편집자로부터 정해진 주제를 받은 것도 있지만 자유 주제 칼럼이 많았다. 그런데 유난스레 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한 건당 하루종일 잡아 먹은 것이 많았고, 심지어 몇차례 고쳐 쓰고 다시 쓰느라 연이틀 아무것도 못하고 그 원고 쓰기에 매달린 적도 있다. 원고지만 대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작가의 블록(writer’s block)’ 신드롬이 있다더니만 바로 그런 증후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시대의 최고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 교수는 젊었을 때 발군의 작품들을 많이 생산했다. 대학(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직후 쓴 소설 ‘우상의 파괴’는 대학가에서 “그책 읽어봤니”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가 20대 후반의 나이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돼 이 신문에 연재한 연작 에세이 ‘흙 속에 저바람 속에’는 한국문화를 제대로 분석했다는 평을 들으며 장안의 지가를 높였다. 그 뿐인가. 일본 문화를 밀착 취재해 분석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후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일본문화론으로 자리매김됐다.
한 10여년 전 이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신문사 와이드 인터뷰 코너 ‘사람과 사람’을 담당할 때였다. 한 시간 약속을 했는데, 얘기하다 보니 서너 시간을 훌쩍 넘겼다. 한 마디 질문을 던지면, 이삼십분씩 답변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달변이었다. 그냥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답변 하나하나가 죄다 기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충실했다.
그중 하나, 아직도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옛날 젊었을 때는 원고지를 대하면 기막힌 아이디어와 멋들어진 표현들이 마치 나비떼처럼 내 눈앞에 날아다녔어요. 나는 잠자리채로 그것들을 잡아채기만 하면 됐지요. 그런데 지금은 나비는커녕 개똥벌레 한 마리 날아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냥 캄캄한 암흑이죠. 원고 청탁이 있을 때, 이전에 한 독서를 바탕으로 남들의 아이디어를 상기해나가며 겨우겨우 빈칸을 메워가고 있을 뿐입니다.” 외람스럽게 지금의 나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그때(당시 60대 후반) 이 교수도 가벼운 ‘작가의 블록’ 현상을 말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물론 그 이후에도 왕성한 창작, 저술 활동을 해 이 교수의 이 발언은 겸양, 혹은 엄살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작가의 블록’과 대척점에 있는게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다. 내면으로부터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창작의 열병을 말한다. 측두엽 이상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인데, 이 병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이 하이퍼그라피아 환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게 왜 축복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 모파상, 파스칼, 바이런, 몰리에르, 단테 등등.. 마치 세계 명작 열전의 작가 리스트 같다. 19세기 인상파 화가 고흐도 전형적인 하이퍼그라피아 환자였다. 화가로 활동한 10년 동안 2,000점이 넘는 그림과 스케치를 남겼고, 오베르에서의 마지막 70일 동안에도 7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러시아 문학의 최고봉 도스토예프스키도 마찬가지다. ‘죄와 벌’ 등 열아홉편의 장편소설, 엄청난 분량의 노트, 일기와 편지를 남긴 그는 측두엽 간질을 앓았었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편지를 보내 “내게 일어나는 신경 발작을 나는 글쓰기에 이용해. 그 상태에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쓸 수 있어”라고 말했는데, 하이퍼그라피아 증세가 어떻게 창작 활동으로 이어지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최근 내 친구 가운데서도 하이퍼그라피아 환자(?) 한 명을 발견했다. 학교 졸업후 40년 동안 쭉 못보던 친구인데,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불과 달포전 이 친구, 고교 동기회 홈피에 자신의 근황을 소개하더니 이후 거의 매일 한두 건씩 장문의 글을 홈피에 올렸다. ‘신마담(신 마닐라 잡담)”이란 제목으로 한 달간 40여편의 시리즈 글을 통해 필리핀 사회의 이모저모와 자신의 해외체류 생활, 그리고 필리핀 근대사까지 종횡무진 누빈다. 걸쭉한 육담을 곁들인 재담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책으로 묶어 발간하면 공전의 히트를 할 것으로 보고 동기회에서 출판 준비위원회까지 구성해 응원할 정도다.
놀라운 것은 40년 동안 비즈니스만 해왔다면서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내용이 그렇고, 마치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이바구하듯 쉽게 쉽게 풀어나가는 글 전개방식도 탁월하다. 경험을 통해서든, 아니면 독서를 통해서든 그의 내면에 온축된 공력이 대단함을 몇 편만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이퍼그라피아 환자라 해도 그냥 글쓰기 솜씨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에 거론한 여러 세계 명작 작가들, 간질병 때문에 남들보다 쉽게, 빨리 쓸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과 독서, 그리고 사색을 통해 창작의 내공을 축적시켰기 때문에 그런 다작, 속필이 가능한 것이다. 이어령 교수가 젊었을 때 그의 눈앞에 날아다녔던 무수한 나비 떼는 그냥 옆집 꽃밭에서 날아온 게 아니라 실은 그가 남다른 노력으로 부화시킨 자기집 정원의 나비들임이 분명할 것이다.
‘세렌디피티의 법칙’이란 게 있다. 미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주창한 것으로 우연으로 보이는 많은 천재들의 걸작물은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 아니라 99번의 실패를 딛고 한번 찾아오는 영감(靈感)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보물을 찾아 떠나지만 보물은 못찾고 대신 기막힌 우연을 잇달아 만나 훌륭한 인생을 산다는 스리랑카의 ‘세렌디프 설화’에서 따왔다. 노벨이 발명한 다이나마이트, 뢴트켄이 발견한 X레이, 플레밍의 페니실린 등이 그런 노력 후 영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 훌륭한 글, 감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평소 다양한 독서와 사색을 통해 내공을 축적해놓지 않으면 안된다. 파스퇴르는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라고 했다. 다음 학기 글쓰기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방침이다. 지금 나는 ‘작가의 블록’ 현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하이퍼그라피아의 축복’을 받도록 하라고 말이다.
채근담에 나오는 <수도거성(水到渠成), 과숙체락(瓜熟蒂落)> 구절은 내가 즐겨 사용하는 좌우명이다. “물이 이르러 도랑을 만들고 오이가 익어서 꼭지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세렌디피티의 법칙과 유사한 뜻이 아닌가 싶다. ‘준비된 우연의 법칙’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