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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낙서의 경계, ‘그라피티’ 국내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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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낙서의 경계, ‘그라피티’ 국내 상륙
  • 취재기자 최은진
  • 승인 2016.01.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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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그라피티가 부정적 국내 여론 조장...아티스트들, “법 지키면 엄연한 창작 예술”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은 지하철 임시 차고지 중 하나다. 깜깜한 새벽에 이곳에서는 첫차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5호선 지하철 차량들이 정차해 있었다. 이때, 힙합 모자와 후드 티로 얼굴을 가린 백인 외국인 네 명이 쇠톱과 절단기로 지하철 환풍구 덮개를 열고 왕십리역 안으로 무단 잠입했다. 이들은 지하철 객차에 접근하더니 주머니에서 스프레이를 꺼내고 능숙한 솜씨로 'KLUE'란 대형 그라피티(graffiti)를 객차 외벽에 그린 뒤 유유히 역을 빠져나왔다. 이 장면은 작년 3월 17일 <이투데이>의 보도를 근거로 우리나라 지하철 차량이 외국인들의 그라피티 낙서로 훼손되는 범죄 현장을 묘사한 것이다. <이투데이>는 이들이 그 다음날에는 안암역, 신논현역을 표적으로 자신들의 그라피티 흔적을 연이어 남겼다고 보도했다. 대학생 신병기(24, 서울 성동구 행당동) 씨는 “그라피티가 유럽에서는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낙서이고 범죄일 뿐이다. 그라피티로 공공기물을 훼손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라피티는 이태리어로 ‘긁다,’ ‘긁어 새기다’란 뜻으로 벽에 스크래치 기법으로 그리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내뿜는 방법으로 그린 그림이나 문자를 가리킨다. 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 길거리 곳곳에서 흔히 보이는 그라피티가 최근 우리나라를 덮치고 있다. 2013년 11월 19일 <이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서울역에 정차돼 있던 무궁화호, 화물열차, 그리고 서울 지하철 1호선 객차 등에 대형 그라피티가 그려진 것이 발견됐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11월 30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내용의 그라피티가 서울 도심 곳곳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공공 기물을 훼손하는 그라피티 행위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 벽에 스프레이와 페인트로 그린 그라피티의 모습(사진: 그라피티 아티스트 최상욱 씨 제공).
철도사범 특별경찰대가 밝힌 그라피티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3년에는 1건, 2014년에는 12건, 2015년에는 2월까지만 4건이나 발생했으며 다양한 지하철역에 걸쳐 나타났다. 이중 철도 차량의 재물 손괴로까지 이어진 건수는 2013년에 5건, 2014년은 15건, 2015년에는 20건이 발생했다. 철도경찰대 기획과 장창석 씨에 따르면, 허가없이 공공기물에 그라피티를 그리는 행위는 형법 366조 재물손괴죄에 해당되는 행위로 2013년과 2014년에는 검거율이 저조했으나, 2015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그라피티 범죄 가담자는 전원 검거됐다.
▲ 최근 3년간 그라피티로 인한 코레일 철도 차량의 재물손괴 건수 현황표(철도경찰대 장창석 씨 제공)
그라피티를 허가된 장소에서 예술로 행하는 사람들을 그라피티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보통 그라피티 아티스트는 그라피티를 그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버려지거나 주인이 허락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그라피티는 철도차량이라는 공공 기물을 훼손한 것이기 때문에 범죄에 해당한다. 개인이나 국가 소유의 건축물이나 시설물에 허락을 받지 않고 그라피티를 그린다면 민형사상 법적 책임이 따른다. 변호사 박봉철 씨는 그라피티 범죄가 민법상 불법행위에 해당하여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할 수 있고, 형사상 재물손괴죄가 적용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거창한 그라피티가 아니라도 남의 집이나 인공구조물에 글씨 또는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행위는 경범죄 처벌법에 의하여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설혹, 행위자가 그라피티의 예술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물건 소유자는 그라피티로 인하여 자신의 물건 효용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민형사상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박봉철 변호사의 설명이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라피티를 그렸을 경우는 어떤 처벌이 가능할까? 범죄가 일어난 지역을 중심으로 범죄를 처벌한다는 속지주의를 취하고 있는 대한민국 형법은 한국인과 외국인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범죄는 우리 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봉철 변호사는 “타인의 동의 없이 무분별하게 그라피티를 그린다면, 외국인이라도 문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김명언 교수는 외국인 그라피티 범죄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라피티로 공공기물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자기들 나름대로 창작행위라고 보는 경향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표출하는 행위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 교수는 “그들은 허가되지 않은 공간에 그림그리기를 한 행위가 범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창작 예술가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최상욱 씨는 그라피티가 고대 동굴에 그려진 그림에서부터 비롯된 오래된 인간 문화의 하나라고 말한다. 현대적 그라피티의 기원은 뉴욕 할렘가이며, 이곳의 이단적인 예술가들이 자신의 태그 네임(닉네임)을 벽면에 빠르게 쓰고 사라지는 것에서 그라피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최상욱 씨는 그라피티는 일종의 태깅인데, 태깅은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이때 태깅의 소재는 자신의 실명일 수도 있고, 자신의 별명이나 좋아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으며, 사물의 이름일 수도 있다고 한다. 죽은 친구의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단어가 그려지기도 한다. 태깅은 말 그대로 자신의 태그 네임을 싸인처럼 남기는 것이다. 태깅은 복잡하게 못 알아보게 쓰는 것, 쉽게 잘 보이게 쓰는 것, 사물의 모양을 흉내내는 것 등 정해진 방법은 없다고 한다. 최 씨는 “태깅을 하다 조금 더 남들과는 다른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입체를 주기도 하고, 모양을 변형시키기도 하면서, 현재의 다양한 그라피티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 사진은 그라피티 아티스트 최상욱 씨의 태그네임 ‘레오 다브’이다(사진: 최상욱 씨 제공).
외국의 경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이지 않은 공간에 그라피티를 그리는 것은 불법이다. 최 씨는 해외에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에게 허용된 합법적인 장소가 우리보다 더 많고, 불법인 장소에 그려진 그라피티라고 해도, 이를 접하는 시민들의 반응은 범죄라기보다는 예술로 보는 경향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최 씨는 “파리 여행을 갔을 때, 거리마다 펼쳐진 그라피티, 즉 스트리트 아트를 보고 놀랐다. 여행 내내 파리 시내에서 미술관을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 해외에서는 그라피티로 꾸민 마을도 있다. 해외 사람들은그라피티가 범죄라기보다는 예술이라는 반응을 더 많이 보인다(사진: 최상욱 씨 제공).
그러나 아직 국내의 그라피티에 대한 반응은 문화가 아닌 범죄에 가깝다. 대학생 정주임(22, 부산시 금정구 장전동) 씨는 “집 근처에서 그라피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라피티가 범죄라는 뉴스가 나오니, 나도 그라피티가 좋지 않게 보인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무진(22, 부산시 금정구 부곡동) 씨 역시 그라피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김 씨는 “그라피티를 보았을 때 예술보다 불법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 부산대 지하철역 근처 온천천에 그려진 그라피티. 물론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그려진 것이다(사진: 취재기자 최은진).
올해로 18년 차 그라피티를 그리고 있는 최성욱 씨는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그라피티가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불법적으로 공공기물을 파손하는 범죄적인 그라피티 때문에 그라피티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한국의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 씨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라피티를 긍정적이고 예술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국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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