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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부 고발자다... 배신자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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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부 고발자다... 배신자로도 불린다”
  • 취재기자 이창호
  • 승인 2013.06.2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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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군 부정 투표를 폭로한 이지문 씨에게 듣는다
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육군 9사단 소속 이지문 중위가 서울 종로에 위치한 공정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군대 내 부재자 부정 투표 사실을 세상에 고발했다. 오랜 과거부터 노태우 당시 정부까지, 군대의 부재자 투표는 군대 내무반에서 병사 각자가 부재자 투표 용지에 기표하고 간부가 수거해 해당 지역구로 우송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소대장이나 중대장들이 특정 정당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병사들을 종용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연했던 군 부정 투표가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으로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대의 부재자 투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병사들이 각자 부대 밖으로 나가 영외 투표소에서 부재자 투표를 하는 영외자 투표 방식으로 바뀌었고, 군내의 정치적 권리 행사가 보장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시빅뉴스는 이 모든 걸 이끌어낸 주인공이며, 현재 ‘호루라기 재단’ 상임이사인 이지문 씨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씨는 어쩌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1992년 당시 시위 한 번 해보지 않은 채 ROTC로 대학을 졸업했다. 또한 재학 중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교 의무 복무 후 바로 삼성 입사가 보장되는 장교 특채 시험에 이미 합격까지 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의무 복무 중인 군대에서 ‘양심선언’이란 용기를 발휘하게 된 연유가 있었다. 이 씨는 자신이 대학생이던 80년대 후반이 민주화 투쟁이 주요 쟁점인 시절이었던 데다, 시위 참여가 금지된 ROTC 학생인 자신이 직접 시위에 나서기는 어려웠어도 저항적이고 반사회적 대학 문화가 몸에 배여 있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선거를 여당에게 유리하도록 병사들에게 종용하라고 상부가 압박하는 상황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료 소대장들을 목격하고 이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말했다. 이 씨는 양심선언을 위해 공선협과 가진 기자회견 직후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대에 의해 ‘근무지 무단이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기소유예로 석방되면서 동시에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부대에서 파면되고 쫓겨났다. 이후 이 씨는 자신의 중위 계급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1992년 12월말에 군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 3년간의 공방 끝에 1995년 2월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선언 당시 함께 복무했던 장교와 병사가 도와준 덕에 기나긴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록 중위 신분은 회복했으나, 그는 이등병 불명예제대, 파면, 내부 고발자란 딱지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등병으로 불명예제대를 했기 때문에 군 입대 전에 합격해 놓은 삼성 기업 장교 특채 입사가 무산됐다. 심지어, 군대에서 파면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규정상 공기업에도 5년간 입사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됐다. 이 씨는 “젊은 장교가 분명하게 보고 들은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현실의 제약 앞에 무너지는 나 자신을 보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었다”고 했다.
▲ 이지문 씨의 양심선언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출처: //nasanha.egloos.com).
특히, 양심선언 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괴롭힌 것은 ‘내부 고발자’란 딱지였다. 공기업은 물론, 내부 고발자란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민간 기업체 입사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를 시민운동가로 이끌었다. 그는 1995년부터 제4대 서울시 의원이 되면서 시민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후 1992년부터 공선협의 대학생 담당 간사, 부정선거감시단의 상황실장, 참여연대의 공익제보지원단 실행위원을 맡는 등 다양한 시민 단체 활동 경력을 쌓았다.
▲ 이지문 씨(사진 제공: 이지문).
이 씨는 2001년부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내부 고발자들과 함께 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그는 ‘공익의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이란 단체를 설립하고 소장을 역임했다. 그가 설립한 단체는 ‘공익 제보자와 함께 하는 모임’으로 개명하고 유사 단체와 통합을 거치면서며, 그 규모가 커졌다. 이씨는 2001년부터 7년간 내부 고발자 운동, 부패방지법 개정 운동,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내부 고발의 중요성 강의 등의 활동이 인정되어 2008년에 정부로부터 국민포장을 받았다. 그는 현재 공익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인물이나 단체 등을 후원하고, 정부 정책과 제도에 있을 수 있는 맹점을 개선하기 위해 일하는 단체인 ‘호루라기 재단’에서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 2011년 여름,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대학교 국가관리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시민운동과 시민사회 관련 강의를 담당하는 외래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공익 제보자로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만약 군 시절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 높은 명예와 지위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양심선언으로 인해 많은 걸 잃게 된 그에게 후회는 없을까? 이 씨는 잃은 것도 있지만 대신 얻은 것도 많았다. 그는 그 사건을 계기로 사회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뜨게 되었고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그러나 내부 고발자로 사는 것이 부담될 때도 있다. 내부 고발자란 꼬리표는 한국 사회에서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는 “한쪽에서는 정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하지만, 또 한쪽에서는 배신자,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렴하게 산다는 것이 거창한 게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는 “청렴하게 사는 게 마치 조선시대 청백리처럼 고생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청렴이란 내가 편법으로 이득을 취하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청렴은 고도의 도덕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일상 생활 속에 필요한 간단한 룰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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