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에서 수석까지...2013년 육사 수석 졸업자 양주희 소위 이야기
160cm를 조금 넘는 크지 않은 키에 깡마른 체구의 여자. 군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작고 고운 손. 하지만 새까맣게 탄 피부와 굳게 다문 입술에서 그녀의 다부짐이 느껴졌다.
유난히도 뜨거운 2013년 8월 여름날,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소위로서 군인의 첫 발을 내딛은 양주희(23) 소위를 시빅뉴스가 만났다.
제주도 제주시에서 출생한 그녀는 학창시절 내내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던 모범생이었고, 초중고 시절 내내 전교회장과 반장을 놓친 적이 없었던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제주시 신성여고 때는 학생회 활동과 함께 문예부에 들어가 문예창작 활동을 하고 시낭송을 하던 감성소녀이기도 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박물관 학예사나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그녀는 2008년 고3 때 다른 꿈을 알게 됐다. 홍보를 위해 학교를 방문했던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는 말에 이끌려 군인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즉시 육사생도가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해서 저녁 6시에 하교한 후 7시부터는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다. 체력은 사관학교 입학의 첫 번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행군이었지만 육사생도가 된 나를 꿈꾸며 힘을 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차 필기시험과 2차 체력검정은 통과했지만, 또 다른 관문인 3차 수학능력시험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사 합격생은 입학식 전에 기초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가입교를 하는데, 그녀는 2009년 2월 가입교 전 날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합격 통지를 기다렸지만,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가입교 당일 아침,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날 육사로부터 추가 합격 통보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녀는 벅찬 가슴을 진정시킬 시간도 없이 지침대로 부랴부랴 머리를 자르고 짐을 싸들고서 공항으로 향했지만, 설날 연휴가 겹친 제주공항 비행기 전좌석이 매진이었다. 그녀는 가입교에 참석하지 않으면 합격이 취소되는 상황이었기에 두 손을 모아 대기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다행이도 1등석 좌석이 예약 취소돼서 가까스로 서울 태릉 육사에 도착, 가입교 훈련에 참석할 수 있었다. 육사 ‘대기 합격자’였던 그녀는 비행기도 대기자 순위에 의해 턱걸이로 탑승하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육사에 진학했지만, 그 덕에 학생회장였던 그녀는 가입교 다음날에 진행된 여고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합격의 기쁨도 컸지만 회장으로서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학교와 친구들에게 미안함이 컸다”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녀는 교정을 같이 쓰는 제주 신성여중과 신성여고 출신으로 6년간 같은 교정을 거닐었다. 그만큼 많은 정이 든 학교였는데, 졸업식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그녀는 “나중에 방학 때 제주도 집에 돌아와서 덩그러니 책상 위에 있는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며 당시의 아쉬움을 말했다.
그런 작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녀는 조국을 지키는 큰 예비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기합격자 중 가장 늦게 추가 합격된 양 생도의 입학 성적은 당연히 동기생 237명 중 237등으로 꼴찌였다.
‘꼴찌의 반란’은 입학 직후부터 시작됐다. 양 생도는 남들보다 더 강한 마음가짐으로 생도 생활을 시작했다. 양 생도는 운동장을 수 km 씩 뛰는 아침 구보 훈련부터 시작하여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도 새벽 2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땀과 비례하여 성적이 올랐고, 1학년 2학기 때부터 졸업 때까지 양 생도는 줄곧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완벽한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입교 후 맞은 첫 여름방학 때 그녀를 본 한 친구가 “왜 이렇게 말랐냐. 얼굴은 또 왜 이렇게 탔냐. 웃을 때 이만 보인다”며 낯설어 할 정도였다. 그녀는 “참기 힘들 만큼 졸음이 와도 절대 졸지 않고 수업에 임했고, 체력단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 우수한 성적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강철 같던 그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양 생도는 2학년 때 받았던 공수훈련이 가장 힘들었다. 그녀는 200m가 넘는 공중에서 뛰어내릴 때 공포를 떨치기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훈련 마지막 날 실제 낙하산을 타고 강하할 때 왼쪽다리가 골절돼 깁스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쳤다는 사실보다 나의 부상으로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훈련 중 힘들 때마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맞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훈련을 마쳤을 때 맛보는 보람찬 기분에 그런 우려는 바로 사라졌다. 그녀는 “현재의 소위 양주희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런 보람찬 기분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20대 초반 또래들은 색색의 화장품을 바르고 하이힐을 신고 한창 놀러 다닐 나이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화장품 대신 위장크림을 발랐고 하이힐 대신 군화를 신었다. 그녀는 외출 때 친구들을 만나 예쁘게 화장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혼자 돌아오는 길에 울기도 했다. 그녀는 “하지만 친구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닦았다”고 말했다.
친구들의 화장 실력이 점점 좋아질 때, 그녀의 체력도 점점 좋아졌다. 생도 2학년 때는 대학 동아리 유도대회에서 개인전 2위, 4학년 때는 마라톤 풀코스에 두 차례 도전하기도 했다. 그녀가 생도시절 이룬 것 중 30회 헌혈로 대한적십자사가 주는 '은장'을 받은 것이 가장 뿌듯했다. 그녀는 “헌혈이라는 것이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기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현헐은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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