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계획대로라면 여행 관련 교양수업 과제를 위해 순천에 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여행을 즐길 수 없을 것 같아 순천행은 이번 주 주말로 미뤘었고, 물론 이번 주말에도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세월호 희생자들이 잠든 안산 합동분향소에 가야할 것 같았다. 그냥, 가고 싶었다. 그리곤 이내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기차값이 비싸다. 그래도 나는 가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차 싶었다. 내가 희생자들에게 한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 어쩔 수 없는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약속, 어쩔 수 없는 일을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어 검은 돈을 벌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도 눈 감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스스로 분향소에 가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찾으려 한 것 같아서, 순간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고, 그 자리에서 KTX 티켓을 예매해버렸다. 그리고 발권완료 화면을 보면서 완전히 깨달았다. 기차값보다, 하루의 시간보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4월 26일 아침, 나는 나의 여행을 즐기는 대신, 그들의 먼 여행을 배웅하는 이별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이것도 여행이라고 합리화하며 열차에 몸을 실었다.
수원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가빠졌다. 순간이동해서 그 곳에 빨리 가고 싶기도 했고, 이 사고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느린 무궁화열차를 탈 걸 하며, 후회하기도 했다.
열차가 수원역에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시선으로, 나도 바닥을 바라보며 열차가 멈추길 기다렸다. 도착 안내방송 후 5분이 더 지나 기차는 역에 도착했지만, 사람들은 몇 분이 지나야 열차가 멈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수원역에서 금정역을 거쳐, 올림픽기념관과 가까운 고잔역에 도착했다. 고잔역은 원래 한산한 역이었는지, 통로도 좁고, 출구로 나가는 계단도 좁았다. 사람들은 천천히 차례를 기다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막상 분향소에 도착하니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고잔역은 작았다. 주변에 이렇다할 상가도 없었고, 낮은 빌라들과 병원 한두 개,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 나는 기념관으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처음으로 이 곳에 온 걸 후회했다. 모든 나무에 노란리본이 묶여져있고, 거의 모든 건물과 차로에 플랜카드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온갖 실감이 나면서 나는 조금 두려웠다.
셔틀버스 안에선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게 쉬는 한숨이 그들의 말을 대신했다. 버스로 두 정거장 되는 짧은 거리가 너무 길다고 느껴졌던 순간은 버스가 고대병원 앞 신호에 걸려 잠깐 서있었던 때였다. 구조된, 아니 탈출한 아이들이 치료를 받고 그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잠든 곳, 그리고 잠들 곳인 고대병원을 버스가 지나고 있었다. 앞 좌석에서 꾹꾹 눈물을 참고 있던 한 아주머니는 작게 울음 소리를 냈다. 안겨있던 아이도 잠에서 깼다.
임시분향소인 올림픽기념관 옆 고잔초등학교 정문에 버스가 멈췄다. 사람들은 자원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운동장을 한바퀴 돌아 처음 제자리로 돌아와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조문행렬이 너무 길어, 또아리를 틀 듯 초등학교 운동장에 줄을 지어 세 바퀴를 돌고 나와 조문객들이 분향소로 가게 해놓았었다. 그렇게 해야 조문객들이 아이들 앞에서 몇 분 묵념할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조문객들이 질서있게 차례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은 말없이 운동장을 줄지어 돌았고, 2시간 뒤 제자리로 돌아와 4명 씩 한줄을 이뤄 기념관으로 향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큰 목소리를 내서 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더 슬펐다. 나는 마음 둘 곳도, 눈길을 둘 곳도 없어 왼쪽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달고 열심히 뛰어노는 꼬마들을 보며 안타깝게 웃었다.
셔틀버스에서 내린 뒤 2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임시분향소 앞에 내가 다가가게 됐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먼저 들어간 조문객들 중 할머니 한 분이 가슴이 미어지는 울음소리를 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울음소리의 내용을 다 알 것 같았다. 이미 내 눈에도 눈물이 났다.
분향소 안은 다른 세상 같았다.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눈을 꼭 감고 들어섰다. 소용이 없었다. 야윈 국화꽃 한 송이를 받아 걸어가는데,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고,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
왼쪽 스크린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진이 떴는데, 나는 그들 모두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명의 얼굴밖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까. 뭘 약속할까. 뭐라고 위로할까. 고민이 많았었는데, 내가 막상 앞에 서니,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슬픔의 크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사진이 많아서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그 사진들 위에 빈 자리가, 빈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나는 하염없이 그냥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국화꽃을 놓고,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겨우 묵념했다. 미안하다고. 자원봉사자 한 분께서 묵념이 끝나면 다음 조문객들이 들어올 수 있게 분향소 밖으로 이동해 달라고 말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근조화환이 줄지어 있는 뒷 편에서 다시 묵념하고 다음 조문객 팀이 나올 때 함께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읽을 수는 없겠지만, 포스트잇에 편지를 써 학부모회에 전달하고 돌아왔다.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서 살게. 절대 잊지 않을게. 다음 생에는 아프지말고, 바다에 가지말고, 그때도 지금과 같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지 마라. 사랑한다. 미안해.”
자, 이제 발 없는 슬픔은 내려놓자. 능력을 기르자. 판단력을 기르자.
세월호 사고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운명을 달리한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