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됐다. 그는 포항의 단칸방에서 7남매와 함께 지독하게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중학생 때는 ‘아이스께끼’ 장사를 해야 했고, 돈이 없어서 상고 야간부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1965년에 현대 그룹에 입사해서 20대에 이사, 30대에 사장, 그리고 40대에 회장에까지 올랐다. 그는 70년대 고속 경제 성장 시대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샐러리맨 신화의 아이콘이었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의 모티브가 됐다.
그는 태국 공사 현장에서 현지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켜 칼로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금고 열쇠를 온몸으로 지켰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은 능력을 중시하는 고 정주영 회장이 그를 초고속 승진시킨 배경이 됐다고 한다. 부인 김윤옥 여사는 대통령 후보 시절 “본인 결혼식도 토요일 오후 4시로 잡아 놓고 퇴근 후 결혼식장으로 달려온 사람”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런 범상치 않은 에피소드는 그가 회사에 목숨을 건 사람, 결혼식 날도 일한 일벌레란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절대로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그의 생애를 관통한 조직 중심적, 일 우선적 삶 자체가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신세대는 소위 ‘워라밸’을 외친다. 워라밸은 일에 치이지 말고, 회사에 충성하지 말며, 여가를 악착같이 즐기고, 퇴근 후에는 가족과 저녁 있는 삶을 살자는 거다. 소위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이란 의미다. 한때 개발 역군의 상징이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감옥으로 갔다. 일한 만큼 박수 받고 물러 났으면 좋으련만, 그의 퇴장은 아름답지 않았다. 최근 개발 역군 세대가 물러간 자리에는 워라밸을 외치는 ‘신세대’가 메우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덕수는 6.25 때 흥남에서 넘어와 서독 광부, 월남전 군수물자사업 등으로 치열하게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는 흥남 부두에서 곧 따라간다며 헤어지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엄마와 동생들 잘 돌보라”는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 큰 아들로서의 의무감이 그의 삶을 죽도록 일만 하게 압박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 늙은 덕수가 아버지 사진을 보며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라는 독백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훈을 잘 섬겼지만, 그의 삶은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전부였다. 그런 덕수도 이제는 사라지거나 뒤로 물러 앉았다. 그 자리에는 워라밸 세대가 들어 서고 있다.
요즘 유럽에 가면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퇴직금으로 여행하는 20대의 한국 젊은이들 천지라는 좀 과장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세대는 아무리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이나 공기업이라도 일이 힘들고 삶이 고달프면 가차 없이 회사를 그만 둔다. 그런 젊은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EBS는 그런 사람들만 모아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회사를 위한 충성심, 업무의 중요성은 그들의 관심 밖이다. 이게 젊은 세대의 강한 트렌드라고 의식한 기업들은 조기 퇴근제, 집중근무제, 아기 돌봄 10시 출근제 등의 선심성 여가 복지 정책을 내놓고 있다. 고용노동부도 2017년 7월에 워라밸을 위해 ‘일가정 양립과 업무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근무 혁신 10대 제안’ 소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정시 퇴근, 퇴근 후 업무연락 자제 등을 비롯해서 건전한 회식문화, 연가사용 활성화 등의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원래 워라밸이란 말은 영국에서 1970년대에 ‘work-life balance’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게 우리나라에 와서 앞 글자를 딴 ‘워라밸’로 불리게 됐다. 워라밸의 개념은 애초에는 일하는 여성들의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게 지금은 모든 노동자의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8>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워라밸이란 단어가 확산됐다. 그는 젊은이들은 직장보다 자신의 사생활을 중시하고 자신만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을 선호한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워라밸을 ‘칼퇴근’, 여가, 여행 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스마트 워라밸>이라는 책도 나왔다. 결국 이 책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앞만 보고 달리는 ‘하드워커’가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잡고 현명하게 효율적으로 일하는 ‘스마트워커’로의 변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명박이나 덕수 세대 식 ‘5 to 9(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기)’ 시대는 갔다. 그럼 ‘9 to 5’가 지켜지면 워라밸이 성취될까? 한 기업 컨설턴트는 일이든 라이프든 만족감이 중요하지 시간 배정, 시간 균형이 워라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일을 더 많이 하면 불행하고, 휴식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빌딩을 물려받아서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한 달에 수천만 원의 임대 수익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의 여가 시간은 넘쳐난다.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섹스나 폭음 등의 일탈행위로 이를 줄이려고 하지만, 스트레스 제로의 무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긴장감을 찾아다닌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긴장을 유지하려는 심리 메카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게 노름이다. 그래서 해외 원정 도박단에는 팔자 좋은 스트레스 제로의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꼭 일이 줄어야 삶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일을 많이 해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과거 세대는 일해서 받는 월급과 보너스로 집과 자동차를 사고 자녀를 교육시켰다. 살림 불고 자식이 성공하는 걸 보는 게 삶의 만족이었고, 성취동기였으며, 행복이었다. 그들은 일만 보고 살아도 즐거웠다. 고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 이론이나 이면우 교수의 W이론(신바람 이론과 유사함)도 무슨 일을 하든 신나게 해야지 억지로 하면 몸이 아프고 회사 다닐 맛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게 신바람 나게 일하고 노는 것일까? 물리학자 겸 심리학자 윌리엄 스티븐슨(William Stephenson)은 <매스컴의 유희이론(The Play Theory of Mass Communication)>이란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인간의 행위는 ‘일(work)’과 ‘유희(play)’ 두 가지로 나눴다. 그러나 그가 일과 유희를 구분하는 기준은 겉으로 볼 때 일을 하면 일이고 여가나 취미 활동을 하면 유희인 것이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즐거움(pleasure)을 느끼면 그게 유희이고, 속마음이 고통스러우면(pain) 그게 일이라는 것이다. 스티븐슨은 신문의 칼럼을 읽는 사람을 무조건 심각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보지 말라고 했다. 그 사람이 딱딱한 칼럼을 읽으면서도 복잡한 세상일을 해석하는 퍼즐 맞추기의 묘미에 심취해서 속으로 환희가 넘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무조건 일을 많이 하는 게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그 반대로 무조건 여가 시간을 확보한다고 그게 삶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 시민을 만나는 공무원,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손님을 응대하는 상인, 스마트폰을 만드는 대기업 직원 각자의 속마음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속마음 가슴 깊은 곳이 즐거운 일을 찾는 것, 그것은 가치관의 소관이다.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정립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그래서 쉴 때도 행복해질 수 있다. 왜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 가치관도 없는 사람은 여가 시간이 늘어났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워라밸은 양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은 아무리 취직이 어렵다 해도 가치관 정립을 위해 책도 읽고, 여행도 가고, 또 멘토와 상담도 해야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했다. “마음이 유쾌하면 종일 걸을 수 있고, 괴로움이 있으면 십리 길에도 지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