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al music will be finished. Please carry on(시그널 음악이 곧 끝납니다. 방송 준비하세요).” 조하나 PD의 말이 끝나자, 느긋했던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사운드를 체크하는 신강렬 엔지니어의 손이 바빠졌다. 모니터에 뜬 디지털 시계 속의 숫자가 9에서 0으로 넘어가는 순간, 라디오 부스 밖에 있는 온 에어(On Air) 표지판에 빨갛게 불이 들어오고, 부스 안의 DJ가 첫 멘트로 방송을 시작했다.
올해로 개국 4주년을 맞는 부산영어방송국(Busan e-FM)은 부산시와 울산, 경남 등 인근 지역을 가청권으로 하는 주파수 90.5KHz의 영어 전문 FM 라디오 방송국이다. 부산시에서 출자한 재단법인 부산영어방송재단이 설립되어 운영의 주체가 되면서, 부산영어방송국은 2009년 2월 27일 개국했다. 부산시 행정부시장이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영어방송국은 부산시 해운대구 센텀동로에 있는 ‘센텀 벤처타운’ 3, 4층에 자리잡고 있다. 시빅뉴스 기자를 안내한 장현준 PD는 업무별로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서 3층은 경영팀이 쓰고, 방송 제작 및 홍보팀이 4층을 쓴다고 설명했다.
원래 부산영어방송의 주청취자는 부산에 거주하거나 부산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이며, 이들을 대상으로 부산에 관한 정보를 영어로 방송한다. 그러나 한국에 부는 영어 열풍을 반증하듯, 24시간 영어로 방송하는 부산영어방송을 듣는 한국인 청취자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방송을 듣는) 내국인의 수도 많이 늘었고, 해외에 있는 교포들도 이 방송을 들어요. 미국의 애틀랜타 한인 방송국과 MOU(양해각서)를 체결해서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이 애틀란타로도 송출됩니다”라고 실무 총책임자인 유정임 국장이 설명했다.
초기 한국인 청취자들은 의사나 교수 등 해외 체류 경험이 있거나 영어에 능한 지식인들, 소위 ‘가방끈이 긴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영어에 흥미를 가진 초등학생부터 뒤늦게 영어 공부에 심취한 60대 할머니까지 비교적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방송을 듣고 있으며, 특히 영어 공부에 적극적인 10대와 20대 학생 청취자수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부산영어방송의 애청취자인 중학생 강세현(14) 양은 친구들의 추천으로 6개월 전부터 부산영어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강 양은 영어 방송을 듣고 있으면, 듣기 실력도 늘고, 영어 공부에 큰 동기 부여가 된다고 한다. 그녀는 “얼른 영어를 더 배워서 영어 방송을 100% 다 알아들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부산영어방송에서 제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뭐냐는 질문에, 장현준 PD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내보내는 프로그램 골고루 인기가 많아서 특정 프로그램이 제일 유명하다고 꼭 집어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매일 저녁 국내외의 새로운 이슈를 전달하는 <Inside Out Busan>은 꾸준히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고, 10대와 20대에겐 학교 이야기와 미국 최신 문화를 음악과 함께 소개하는 <Midnight Rider>가 인기가 많다고 한다. 또 일요일에 진행하는 <English Konglish>도 실생활에 유용한 회화를 소개하여 전 계층의 청취자가 고루 듣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영어 능력과 방송에 대한 열정,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인력을 찾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방송하기 때문에 부산영어방송의 진행자는 모두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들이 맡는다.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많고 국민이 영어에 관심이 많은 상황에서 영어방송이 개국됐으니 초기부터 방송국 운영이 순풍에 돛을 단 듯 거침없었을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유 국장은 초창기 운영이 쉽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쳤다. “지금이야 입소문이 제법 나서 우리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력서가 밀려들지만요, 개국 초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직접 수소문하곤 했어요”라고 유 국장은 말했다.
이처럼 진행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야하기 때문에 방송을 만드는 PD, 방송 작가, 엔지니어들도 능숙한 영어 구사 능력이 필수다. 신생 방송국이, 그것도 지방에서 영어와 방송 둘 다 아는 인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유 국장은 초기 고충을 털어놨다.
유 국장은 영어 되는 사람들을 스카우트하여 방송을 겨우 가르쳐놨더니 서울에 있는 방송국으로 도망가듯 이직을 하는 일도 생겼다고 한다. 사람이 급하면 PD들을 이끌고 길거리로 나가서 직접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단다. 유 국장은 “내가 한 외국인을 ‘너 로버트 할리만큼 유명해지고 싶어? 그럼 날 따라와!’” 이렇게 ‘꼬신’ 적도 있다고 한다. 개국 당시 유 국장이 이렇게 섭외한 진행자로 ‘방송 초짜’였던 그 외국인, 채드는 지금은 부산영어방송의 인기 프로그램이 된 <Midnight Rider>의 진행자 겸 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올해로 한국에 온 지 7년째인 캐나다 국적의 크리스 스펜서 씨는 부산의 명소를 소개하는 <Travel Bug>의 진행자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부산 인근의 52군데의 명소를 방문했다는 크리스 씨는 “해운대 요트 경기장이랑 금정 스포원 파크가 가본 곳 중 제일 좋았어요!”라고 부산 명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크리스 씨는 인터뷰 중간 중간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여지없이 모국어인 영어를 사용했다.
개국하고 4년이 지난 지금, 유 국장은 부산영어방송 개국 당시에 설정한 ‘이뤄야 할 목표 51가지’에서 50개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했다. 방송의 질과 인지도에서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까지 수익은 그리 많이 나는 것은 아니라고 유 국장은 설명했다. 광고 수익으로 부족한 방송국 운영에 드는 돈은 부산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부산영어방송은 언제나 ‘공익성’을 염두에 두고 일한다고 한다. 부산영어방송이 유명해지니 사설 영어 교육 업체에서 파트너나 스폰서 제의가 많이 들어오지만, 유 국장은 ‘공익 추구’란 방송국의 가치 아래에 단호히 거절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산영어방송은 공익적인 차원에서 어린이 아나운서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BIKA(Busan International Korean Angels)'라는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부산영어방송은 한 달에 한 번 영어를 잘 하는 초등학생 2명을 뽑아서 한 달간 10대 청소년을 위한 라디오 프로그램인 <School of Rock>의 아나운서로 직접 방송을 진행하는 기회를 준다. 갈수록 어린이 아나운서 선발 경쟁이 치열해져서, 가장 최근의 선발 때에는 경쟁률이 무려 70 대 1에 달했다고 한다. BIKA는 이렇게 어린이 아나운서로 활동한 어린이들을 모아서 조직한 봉사단체다. 이들은 부산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국제 행사에서 통역 봉사를 맡아 하기도 한다.
유 국장은 이렇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획이 많은 이유는 부산영어방송의 사회 공헌 활동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기회를 부산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제공해 이들을 글로벌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글로벌 리더는 경험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자질이 충분하다고 봐요. 우리는 그 자질을 꽃피울 수 있게, 그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다양한 활동 기회를 주는 것이 영어방송의 몫이지요”라고 유 국장은 말했다.
올해 부산영어방송의 목표는 장기적으로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라고 유 국장은 밝혔다. ‘영어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어와 일본어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이유는 관광 도시인 부산에 살거나 여행 오는 외국인 중 일본인과 중국인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서울과 광주에 있는 다른 영어방송국들과 차별화하고, 부산에 있는 더 많은 외국인들을 청취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산영어방송은 다언어 방송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유 국장은 “(다언어 방송은) 부산영어방송이 제2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부산 시민들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입니다. 우리 부산영어방송은 15명의 직원들과 전투적으로 일하면서 언제나 부산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