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은 학령이 안 된 어린이의 심신발달을 위한 교육시설이라 정의된다. 이 정의는 누가 내린 것이며 과연 타당한 것일까. 유발 하라리식의 분석론을 빌리건대, 현재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수만 년 동안 이제 겨우 만으로 대여섯 살 난 아이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심신발달을 이루도록 진화해왔다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아이들은 수만 년 동안 이웃사촌의 관심을 받으며 또래와 어울려 산으로 들로 참새처럼 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자유로웠고 스스로 놀이의 규칙을 정했으며 적당하게 싸웠고 해바라기처럼 화해했다. 엄마는 언제나 집을 지켰기에 애착관계는 끈끈했고 해는 항상 그곳에서 떠올라 그곳으로 졌으며 동구 밖은 아이들의 축제가 매일 벌어지는 장소였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직장이란 데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게 된다는 걱정어린 분위기가 마을을 휘감았다. 동구 밖으로 도로가 나고 굉음을 울리며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에 유괴범이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어느 날 졸린 눈을 뜨니 이제 다섯 살 난 한국의 철수는 강제로 유치원이란 데를 다녀야만 했다. 거의 태어나자마자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던 영희는 자주 운다는 이유로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뺨을 두 대씩이나 맞았다.
자본주의는 마을의 모든 어른을 직장으로 내몰았고 남겨진 아이들은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차를 타게 되었다. 항상 원숭이처럼 엄마에게 매달려 엄마의 젖꼭지를 만지고 엄마의 혀와 몸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던 철수와 영희 세대는 빵과 우유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자본주의 혜택을 제일 먼저 누림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그늘을 제일 먼저 겪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통제와 억압의 와이파이존으로 들어간 철수와 영희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유치원의 역사는 찰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규칙과 질서의 다른 이름은 통제와 억압이다
“지난 세기 해리 할로라는 심리학자는 갓 태어난 새끼 원숭이들을 곧바로 어미에게서 떼어내 작은 우리에 가두었다. 그리고 우유병이 장착된 금속모형 어미와 우유가 나오지 않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덮인 모형 어미 중 선택을 하게 했다. 그랬더니 새끼 원숭이들은 젖이 나오지 않는 부드러운 천으로 된 어미에게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포유류는 먹이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새끼 원숭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천으로 된 어미는 새끼 원숭이들의 애정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끼 원숭이들은 심각한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겪었고 결국 신경증에 걸린 반사회적 성체로 성장하고 말았다."(<호모데우스> 129쪽)
그래서일까. 내 친구 재영이는 돈은 자기가 벌겠다며 약사인 부인의 직장생활을 반대했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명분이었다. 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무려 약산데 남녀평등인데 말이다.
하여간 멋있다는 건 남과 다름을 말함이다 이런 차원에서 재영이는 멋있는 놈이다. 보통 사람과 다른 건 재벌들이 그러하다. 멀쩡한 전문직 여성이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가면 모든 활동을 접는다. 내조와 육아에 전념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결혼적령기의 남성들이 여성의 직업을 묻고 결혼의 조건으로 따진다는 건 보통이라는 거다. 그리고 멋있지는 않다는 거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찾는 이는 단언컨대 다 위선자라는 완전한 자유주의 경제 신봉자인 내 친한 형의 지론에 의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남자로 사는 거 참 어렵다.
나도 모르게 체면을 중요시하는 동물로 진화된 한국 남자동물이 갑자기 그 체면을 모른 체해야 하는 쑥스러움에 직면하는 상황은 철수와 영희의 당혹감보다는 비싼 감정일까.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우리 선조들의 호연지기는 그 언제이던가. 마지막 백두산 호랑이가 사라지면서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처가 재산을 탐내는 지경으로 변이되고 말았다. 셋째딸은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데 이제 돈 없고 직업 없는 셋째딸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서울대 나와도 돈 없으면 여자들이, 아이! 재수 없어, 라고 한다는 우스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셋째딸이 외동딸에 밀리는 역전현상과 때로 서울대가 재수 없는 곳이 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하물며 공자가 말하는 군자도 아이러니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돈 없는 군자는 군자가 아닌 것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치마폭은 든든한 존재의 진지다. 엄마의 치마폭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아이는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이다. 다른 아이들이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에게 일러바치고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친구들이 노는 곳으로 간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타이르는 엄마 뒤에서 아이는 빼꼼히 얼굴만 내민다.
대학 3학년 소개팅 상대였던 숙대생 그녀는 엄마랑 별로 친하지 않다. 늘 혼자였다고 침울하게 말했다. 언론인 김선주가 엮은 <이별에 대한 예의>라는 좋은 책이 있다. 거기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이야기가 나온다. 커리어우먼이자 항상 바빴던 어머니 대신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마저 자애로운 성격이 아니어서인지 결국 비행기를 잘 타지 못하는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다는 거다.
워라밸, 가정의 달, 유연근무, 돌봄휴가, 직장유치원, 출산휴가 등은 직간접적으로 아이에게 엄마를 돌려주자는 취지다.
3월 4일 하룻동안 벌어진 한유총 개원 연기 사태의 본질은 아이들을 볼모로 삼은 데서 나아가 생업에 열중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 엄마 아빠들에게 서글픔 마저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칼로 찌르되 비틀지는 말아야 한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세상에 보냈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이제 신이 어머니를 보냈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세상이다. 엄마보다 더 좋고 따듯한 유치원이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