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내가 겪은 6.25 한국전쟁...피난 봇짐 싸며 우시던 어머니
김민남
승인 2019.07.0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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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어 나가는 국민방위병들 보고 눈물
야전 군 병원의 신음하는 병사들 모습은 지금도 생생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이 자랑스럽지만 통일의 염원 이뤄졌으면...
올해는 6.25 한국전쟁 69주년이다. 우리 겨레에게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이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값지고 따라서 쉽게 얻어지는 가치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는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전쟁이기도 하다.
UN의 결의로 이 전쟁에 참여한 국가가 15개국이다. 북쪽에는 70만 '중공군'이 참전했다. 인명피해는 제2차 세계대전을 능가한다. 사상자(死傷者)만 200여만 명에 이르고, 산업시설과 철도 및 도로 등 기간 사회간접자본은 거의 완전 파괴되었다. 전쟁의 잔인성과 이념의 참혹성이 보여준 20세기 후반의 사실상 국제전이다. 이 폐허에서 10여 년만에 다시 일어섰으니 우리는 정말 대단한 국민이고 세계 유례없는 복구재건(復舊再建)의 역사를 기록한 국가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내게는 잊지 못할 슬픈 개인사 두 가지가 떠오른다. 전쟁의 포성이 고향 청도와 인접한 창녕과 대구 쪽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초췌하고 피로에 지친 피난민들의 대열이 끝도없이 이어지면서 어머니의 손길은 바빠지고 얼굴에는 수심(愁心)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초등 5년이었던 어린 나는 호기심이 커지고 또 학교에 나가지 않으니 뭔가 마음이 좀 떠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내 마음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피난 봇짐을 우리 형제자매들 덩치에 맞게 꾸려서 어깨에 메어주는데 너무 무거웠다. 그러는 어머니는 울음을 속으로 삭이면서 눈물이 비오는 듯했다. 저 어린 것들을 데리고 피난 길에 나서는 것도 막막했지만 남다른 효부(孝婦)였던 어머니는 나이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어찌해야 할지 속수무책, 감당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때 충격 때문인지 어머니는 수(壽)를 오래 누리시지 못하고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
또 그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밀고 들어온 '거지'나 다름없는 이른바 '국민방위군'들이 먹을 것이 없어 들과 산으로 나가 개구리를 잡아먹고 돼지감자 등을 캐서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보름쯤 지나자 그나마도 구할 수 없어 한 두명 굶어 죽어서 학교 앞산에 묻히기 시작했다. 어린 가슴에도 상처가 크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이 방위군 사건은 훗날 밝혀졌지만 윗선의 간부들이 식량을 착복한 데서 빚어진 전쟁 중의 있을 수 없는 횡령비리였다.
또 하나 큰 충격을 준 일이 또 있다. 청도군에서 긴급히 꾸린 피난민 위문단에 나는 '웅변' 학생으로 뽑혀 산넘어 금천면 노천 뙤약볕에 굶주리고 있는 수천 명 피난민 앞에서 위로 '연설'을 했다. 그런데 피난민들은 위문공연에 아무 흥미도 없이 그저 공연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지친 표정만 가득했다. 공무원들이 피난민 심정이나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국민방위군들의 죽을 듯한 표정이 그들 힘없는 눈동자 위에 겹쳐 더 이상 연설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과감히 연설을 마무리하고 단상에서 내려와버렸다.
또 그 무럽 나는 어른들 심부름으로 간호장교로 있던 이종 4촌 누님을 50리나 떨어진 밀양 임시 야전(野戰) 군(軍)병원으로 떡을 싸들고 걸어서 면회 가야 했다. 병원 안팎에 가득한 부상 군인들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는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어린 가슴에 또 한번 전쟁의 참상이 대못처럼 깊이 박혔다. 왜 이런 심부름을 어린 내게 시켰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
다행히 북한 공산군들이 UN 참전 15개국과 한국군이 최후의 보루로 지키던 대구 창녕 왜관 경주 포항 등지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위선'을 똟지 못해 우리 가족은 피난은 가지 않았다.
그때 그 험악한 전쟁에서 보여준 우리 국민들의 끈기와 인내는 정말 굳세고 대단했다. 1953년 전쟁은 휴전조약으로 끝나고 전후 복구가 시작되었다. 그 휴전은 66년 간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세계 최장(最長)의 휴전으로 기록 중이다. 나도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학교에 가면서 그렇게 전쟁은 우리한테서 물러갔다.
그러나 나라와 국민들이 입은 생채기는 엄청 컸다. 한참 후에사 알았지만 그때는 국민의 희망이었던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北進統一)은 물건너 갔다. 갑자기 '중공군'(중화인민공화국군)이 북한을 도와 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세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했다는 장진 전투와 치열한 전쟁 중 가장 휴머니즘적 모습을 보여줬다는 함흥 북한 피난민 철수작전도 이때 있었다. 전세가 유리했던 북한의 국민들 15만여 명이 영하 40도의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남행하는 미국 군함에 필사적으로 승선하려고 한 너무도 절박한 피난민 대열은 그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진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린 미군과 한국군 등 연합군은 과감하게 무기들을 적국에 넘겨주고 대신 적국인 북한 피난민들을 태우고 철수한 미군 중령 책임자는 군인으로서 그후의 감당하기 불가능한 군사작전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휴머니즘 같은 것이 전쟁에 끼어든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남북간 통일의 꿈은 다시 멀고도 먼 역사에 맡겨졌다. 해방 74년, 한국전쟁 69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남북 분단의 아픔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살아 간다. 남북 간 국민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기에는 앞으로도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가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1999년 내가 북한 평양과 원산을 방문했을 때 만난 야윈 얼굴들과 황폐한 산야를 보면서 분단은 오래 기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진 적이 있다.
이제 한국전쟁은 우리나라나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잊혀져가는 전쟁이다. 그사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정상회담에 이어 DMZ를 찾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전격 회동을 가지는 등 큰 이벤트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개발했거나 개발하는 핵무기에 관한 한 감축이나 포기 등 전혀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 있고, 미국도 북핵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가는 모습이다.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는 더 깊어지고 있는 듯하다. 안보와 국방에 하루도 소홀할 수 없는 이유다. 예고된 전쟁은 역사상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달러,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것은 그야말로 자랑스런 '한강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또 동족끼리 총을 겨눈 비극의 한국전쟁은 세계 전사상(戰史上第一)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데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미 국무부 기록이 있다. 역설적인 기록인 셈이다. 이 기록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는 아직은 규정하기 어렵다.
전쟁은 우리 세대로서 끝나야 한다. 이산(離散)가족, 탈북민(脫北民), 실향민(失鄕民), 200여만 명의 국민과 젊은 외국군인들의 희생, 남북 무력대치 등 그 상흔(傷痕)이 너무 크고 깊고 오래 가고 있다. 또 당시 UN회원국 가운데 전투병을 파견한 국가는 15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 63개국에 이른다. 지원을 해준 이들 국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셈법이 있겠지만, 그리고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국가와 국가 사이라고는 해도, 지원을 받은 우리들은 언제나 그 고마움을 잊어서 안되는 '채무국'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모윤숙 시인), <광장>(최인훈 소설가), <태백산맥>(조영래 소설가) 등 전쟁 문학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국제 규모의 이념지향적 전쟁이 자그만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전쟁 종식과 함께 북한과 쿠바 등 몇 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들, 특히 소련과 중국에서조차 이념(设计理念)이 기치 대열에서 사라지고 있다. 큰 변화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