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는 매년 11월 5일이 되면 화려한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가이 포크스 데이(Guy Fawkes Day)'라고 불리는 이날은 1605년 11월 5일, 의회 의사당을 폭파해 왕과 대신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려 했던 가이 포크스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왕실에서는 왕의 무사함을 축하하기 위해 이날을 ‘감사절’로 정하고 불꽃놀이를 벌이도록 했지만, 당시 민중들은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의미에서 ‘가이 포크스 데이’라고 부르며 불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에 저항하고자 맨몸으로 적진(의사당)으로 들어갔던 가이 포크스는 대중문화에서 ‘저항의 아이콘’이 된다.
무정부주의자 주인공이 전체주의 정부에 맞서는 내용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주인공은 가이 포크스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쓴 채 시종일관 벗지 않는다. 현재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전 세계 곳곳 반정부 집회 현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최근에는 ‘현대판 가이 포크스’들이 홍콩에서 대거 나타나고 있다.
범죄자 인도 법안(송환법)은 홍콩의 사회 혼란을 부추긴 장본인이다. 이 법은 홍콩에 있는 범죄 용의자들을 중국 정부가 중국으로 데려가 재판에 세우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홍콩 시민들은 해당 법안 이행 시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전부 중국에서 소환해 갈 수 있다고 우려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위가 사그라들 기미 없이 석 달째 계속되자,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지난 9월 4일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들을 폭도로 규정한 정부에 대한 사과와 함께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투쟁 중이다.
이에 홍콩 정부는 ‘최근 급증하는 집회 참가자들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대응책’이라며 ‘복면금지법’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복면금지법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홍콩 시내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14세 남학생이 복면 금지법 반대 시위에 참석하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사실상 복면금지법은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홍콩에서 복면 금지법이 시행된 첫날(5일) 국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복면 금지법’이 한동안 상위에 랭크된 것은 해당 법안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증명한다.
대다수 네티즌은 복면 금지법에 관한 자신의 부정적 견해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이번 홍콩의 복면 금지법 시행은 우리 국민에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특히 복면 시위 못 하도록 해야 합니다. IS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민중총궐기에 나선 시민을 복면을 쓴 채로 인질을 살해하는 테러리스트에 비유한 것이다. 국내에서 당시 꽤 진지하게 논의되던 복면금지법안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으로 구체화됐다.
집권 여당은“민주노총 주관의 대규모 시위에서 복면을 착용하고 나타난 시위대”가“철제 사다리로 경찰차를 부수고, 의경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각종 폭력 행위를 남발”했는데,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복면금지법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오늘날 홍콩 정부와 4년 전 한국 정부가 복면금지법안 도입의 필요성으로 폭력 시위 방지라는 같은 이유를 제시한 것은 사뭇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폭력 시위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 복면금지법을 도입하겠다는 홍콩이나 과거 우리 정부의 선택은 옳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정부가 이 법안을 도입하려는 의도를 폭력 시위 방지를 위해서라기보단 체제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당 법안을 지지하는 이들은 ‘떳떳하면 복면을 안 쓰고 시위에 참여하면 될 것 아니냐’ ‘복면을 쓰면 익명성을 보장받아 폭력행위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시위 과정에서 일부 일어났던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워 시위의 정당성을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특히 복면금지법이 논의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시위는 폭력적이다’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어 애초 시위가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한 국민의 합리적 비판을 흐릴 수 있다.
한편,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등 인권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도 이미 복면금지법을 시행하고 있으니 국내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진실이다. 현재 복면금지법을 도입한 나라 15개국 가운데 시위대를 직접 겨냥한 나라는 러시아 정도뿐, 나머지 국가는 약자를 보호하거나 집회·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보호하려고 이 법안을 도입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신나치 세력들이 복면을 쓰고 집회·시위 참여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법이 만들어졌고,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 테러리스트 집단인 KKK단의 횡포를 막고자 복면 금지법을 도입했다. 따라서, 이미 많은 선진국이 복면금지법을 도입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시위대가 복면을 쓸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은 전제부터 잘못된 주장이다.
“얼굴은 장치에 의해 포착됨으로써 권력에 노출되고 권력에 등록됨으로써 그 힘에 포획된다.” 조선령 부산대학교 교수는 논문‘복면의 문화 정치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복면은 자신의 얼굴이 식별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쓴다. 식별이 가능하다는 말은 곧 추적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복면을 쓴 채로 시위에 참석하는 사람 대다수는 추적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복면을 썼으리라 본다.
정치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낙태죄와 같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관한 집회의 경우 많은 언론사가 취재 현장을 찾는다. 그리고 이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유포돼 SNS와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돌게 된다.
문제는 시위 성격과 반대되는 성향의 커뮤니티에 사진이 공유됐을 때다. 예를 들자면, 페미니즘 시위 현장 사진이 반(反)페미니즘 성향의 커뮤니티에 게시되면, 커뮤니티 회원들은 댓글로 시위자의 외모 비하는 기본이고 시위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의사,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자신의 얼굴이 언론, SNS, 커뮤니티에 박제되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인신공격을 당하는 것까지 감수해야 할까?
나는 이러한 현실이 정말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진정한 집회 참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시위자가 복면을 쓸 수 있는 선택권을 사회가 나서서 보장해줘야 한다.
*편집자주: 위 글은 독자투고입니다. 글의 내용 일부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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