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이 인구 몇십 명당 한 개꼴로 넘쳐나고있다. 쉽게 문열고 또 쉽게 문닫는다. 요즘 TV 프로도 '먹방'이 인기를 차지하고 젊은이들은 셰프를 부러워한다.
400년 전 허균은 조선 팔도 음식을 평하고 요리 방법과 재료도 알려주었다. 오늘날 먹방 프로그램의 유명한 진행자였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은 1611년(조선 시대 광해군 3년)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한 허균 (許筠: 1569~1618)이 전국 8도의 당시 음식과 요리, 특산물에 관해서 서술한 책이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 <도문대작>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요리책으로 평가된다.
허균은 책 서문에서 “내가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니 지난날에 먹었던 음식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다. 이에 유(類)를 나누어 기록해 놓고 때때로 보아가며 한 번 맛보는 것이나 못지 않게 한다”고 밝히고, 당시의 식품을 유형별로 나누고 이들 식품의 특징과 명산지를 설명하고 있다. 내용은 방풍죽(防風粥: 강릉) ·석이병(石耳餠: 개성) ·엿 ·대만두(大饅頭) ·두부 ·다식(茶食) ·웅지정과(熊脂正果) 등 병이류(餠餌類) 11종, 강릉의 천사배(天賜梨), 전주의 승도(僧桃) 등 과실류 28종, 곰의 발바닥(熊掌), 표범의 태(豹胎), 사슴의 혀와 꼬리 등 비주류(飛走類) 6종, 붕어 ·청어 ·복어 ·송어 ·광어 ·방어 ·도루묵 ·홍합 ·대하 등 해수족(海水族) 46종, 무 ·배추 등 채소류 33종, 그리고 기타 5종을 나열하고, 이들 식품의 특징과 명산지를 밝혔으며, 끝으로 서울 음식 28종을 계절과 재료에 따라 분류하였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실국수(絲麫)에 대해 설명하면서 중국의 오동(吳同)이라는 사람이 이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오늘날의 ‘우동’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다.
허균은 1611년 4월에 쓴 저자의 책 끝머리 제사(題辭)에서, <도문대작>이라는 제목은 고기를 먹고 싶으나 먹을 수가 없으므로 도문(屠門, 도살장의 문)이나 바라보고 대작(大嚼, 질겅질겅 씹는다)하며 자위한다는 것으로, 가당치 아니한 것을 부러워 한다는 뜻이다.
허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 명가의 하나였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형인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 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균의 이복형 허성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 형인 허봉은 유희춘의 문인이며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히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또한 허균과 동복 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 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이 있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우리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 <홍길동전> 찬자와 관련해서 이견이 있기는 하다.
허균의 관직 생활은 선조 27년(1594) 과거 급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사관직인 검열을 비롯해 '세자시강원설서' 등을 지내다가 황해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파직되었다.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허균의 호 가운데 하나가 교산(蛟山)이다. 교산에서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한다. 허균의 호인 교산은 그가 태어난 강릉의 사천진 해수욕장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현실로 돌아와서 음식 솜씨가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도문대작>에 기록되고도 남을 장인 정신을 가지고 식당을 개업하면 성공할 것이다. 맛으로 승부하지 않고 손쉬운 창업에 나서면 십중팔구는 실패하게 된다.
입맛이 떨어지고 지치기 쉬운 여름이다. 가까이 있는 '도문대작'을 찾아나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