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재원(29) 씨는 매달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한다. 김 씨는 ‘소소하게 지출한다’기보다는 ‘악착같이 쓰지 않는다’에 가까운 편이다. 김 씨는 “요즘같이 빡빡한 세상 속에서 오랜 직장 생활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하루빨리 은퇴해서 평온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부자를 꿈꾸지 않고, 그저 은퇴 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모아서 최대한 빨리 은퇴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고 한다. 파이어족은 1990년대 미국에서 시작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소득·고학력 전문직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자산을 빨리 만들고 빨리 은퇴해 이자소득으로 살자는 전략이다. 극단적인 절약으로 지출을 줄이고, 늦어도 4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최근 대한민국의 파이어족들이 속속 생기는 현상도 직장이 성취감을 주지 못함에 대한 불만과 학자금 대출 상환 부담, 전통적 사회 보장제도의 붕괴, 극심한 부황 속에서 보다 안정된 삶을 향한 열망이 불러일으킨 것으로 분석된다.
파이어족인 김 씨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자린고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 씨가 먹거리를 살 때는 유통기한이 임박해서 할인하거나 떨이 식품을 구매한다. 한번 구매한 옷도 3년 이상은 거뜬하게 입고 다닌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되도록 집에서 가지거나 저렴한 술집을 가는 것을 고집해서 친구들의 핀잔을 듣기도 일쑤다. 김 씨는 “떨이 식품도 다를 것 없이 내겐 똑같은 맛이라 문제없다”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아끼는 생활도 나에겐 행복하다”고 말했다.
파이어족의 필수 요건은 노후자금 비축과 절약이다. 은퇴 후 수입이 없을 때를 대비해 철저히 모아야 한다. 미국 파이어족 평균 노후자금은 한화로 약 11억 8000만 원 정도다. 이 돈을 활용해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투자해 얻은 연 5~6% 수익금을 노후 생활비로 사용한다. 때문에 이들은 젊을 때부터 경제와 금융시장 동향 공부에 집중한다. 아무리 늦어도 40대 초반에 퇴직해 빚이나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처절한 현재를 버티는 것이다.
파이어족을 자처한 최연주(32) 씨는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줄어들기 때문에 젊을 때 벌어두려 한다. 최 씨는 “돈을 악착같이 아끼더라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은 많다. 하지만 은퇴 후에 돈이 없는 것은 너무 힘든 삶이다”라며 “은퇴 후 즐거운 삶을 기대하며 지금은 절약하고 있다”고 현재 파이어족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열심히 돈을 아끼는 파이어족과는 반대로 미래보다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네 인생은 한 번 뿐이다(You Only Live Oce)’를 외치는 욜로(YOLO)족이다.
대학생 조은민(22) 씨는 구매하고 싶은 것은 바로 구매하고, 먹고 싶은 것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이른바 ‘욜로 라이프’를 즐기며 산다. 조 씨는 파이어족에 대해 “사람일은 내일도 모르는데, 먼 미래까지 걱정하며 사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다”며 “노후를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오직 지금이라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그 행복도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무작정 파이어족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마다 처한 경제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에게 맞는 인생설계를 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은퇴 후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투자수익에 너무 의존할 경우 금융시장의 상황에 따라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소득 직종이 아닌 이상, 절약을 통해 경제적 자립은 한계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를 마다하지 않는 욜로족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파이어족, 양측의 공통점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직장인 박우현(34) 씨는 “양측 모두 직장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벗어나고 싶은 2030세대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 같다”며 “어느덧 행복을 위해서는 경제능력이 9할 이상 뒷받침돼야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