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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5제(題),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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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5제(題), 여덟 번째
  • 편집위원 박기철
  • 승인 2016.04.1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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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를 넘어 생존주의로
▲ 편집위원 박기철

그동안 황령산 칼럼에 필자는 쓰레기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그 맥락을 이어서 2015년 1월 1일부터 매일 쓰레기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서 12월 31일까지 썼다. 그 중에서 최근의 아홉 꼭지를 황령산 칼럼으로 갈음한다.

346. 12월 12일. 土. 삼랑진→부산. 살기좋은 겨울날이다.

 

 

 

▲ 저 바위에서 나오는 좋은 에너지(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좋은 기운을 빨아들일 살기의 원천

명리학. 풍수학, 음양학, 주역학 등이 있다. 서양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학문들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상만물이 움직여지는 학문으로 중요시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모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는 이들을 전공으로 연구하며 교육하고 있다. 나는 동양인으로서 이러한 학문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게 아니라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반물질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세상은 물질의 질량을 이루는 입자와 에너지를 이루는 파동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빛은 입자나 파동의 하나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성질이 중첩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양자역학과 대척된 견해를 가졌던 아인슈타인도 에너지와 질량이 따로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엠씨스퀘어(mc²) 공식이다. E=mc². 에너지(E)는 질량(m)에 광속(c)을 제곱한 값과 같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입자로 되어 있으므로 질량이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상관하는 에너지도 있다. 질량을 가진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반물질적인 파동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풍수지리학에서 기(氣)라고 하는 것은 질량을 가진 입자가 아니라 파동으로 나타나는 에너지일 것이다. 저 산 기슭에 노출되어진 바위에는 좋은 기운이 흐른다고 한다. 유해하지 않은 좋은 파동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주변에서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다고 한다. 일리있다. 근거있다. 그런데 그 좋은 기운을 죽이는 것이 있다. 여기 마을에는 하수도가 없단다. 용변, 설겆이, 세탁, 목욕에 따른 오수가 하수관으로 흐르지 않고 그냥 지하로 스며든다면 저 바위에서 내뿜는 좋은 기운은 사라질 것이다. 쓰레기 물에 함몰되어 살기(煞氣)가 흐를 것이다. 부디 그리 되지 않게 어서 빨리 하수관 정화 처리 시설이 온전히 들어오길 바란다.

347. 12월 13일. 日. 부산. 춥지 않은 날이다.

▲ 무참하게 버려진 장식용 양초(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비정상적 풍요의 시대에 생긴 진풍경

진풍경(珍風景)이다. 자고로 이런 진풍경이 없었다. 멀쩡한 양초가 저렇게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순 우리말인 초는 지방성 물질을 원통 모양으로 굳히고 그 가운데에 실 따위로 심지를 박아 불빛을 내도록 만든 물건이다. 양초(洋-)란 서양에서 온 버선인 양말(洋襪)처럼 서양에서 건너 왔다. 나 어릴 적에 촛불은 등불보다 귀한 것이었다. 양초는 청나라식 등불인 호(胡)롱불보다 훨씬 밝지만 금방 닳기에 아껴 써야 하는 것이었다. 양초불을 켜는 것은 부를 과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니 제사 지낼 때나 잠깐 쓰는 것이었다. 전기불이 들어온 이후로도 제사 때 양초를 켜는 풍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잔이 초를 받치는 촛대를 훔친 것도 성당에서다. 절이나 성당에서 촛불을 켜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양초는 달리 쓰인다. 양초를 켜서 방 안의 향을 좋게 한다거나 실내 장식을 멋지게 할 때 쓰이고 있다. 또한 1회용 컵 안에 촛불을 켜서 작은 횃불처럼 보이도록 하여 군중 시위할 때 쓰이고 있다. 조명용이나 제사용으로 쓰이던 양초가 장식용이나 시위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저 버려진 양초는 그 외양이나 색깔로 보아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것같다. 이 동네 누군가가 많이 사놓았다가 저 양초에 문제점이 있다는 언론보도를 듣고 저렇게 버린 것같다. 실내에서 촛불을 켤 때 발암물질이 새어 나온다는 뉴스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화학성분이 아닌 천연성분으로 만든 양초가 나왔다고 들었다. 원래 양초는 벌집의 성분인 밀랍(蜜蠟)이나 소, 고래 등의 동물 기름인 수지(獸脂)를 굳혀서 만들었다. 이후 석유 정제 부산물인 파라핀으로 만들다가 연소시 유해성 논란 때문에 콩기름으로까지 만든다. 이제 한물 간 양초가 되어 저렇게 쓰레기로 버려진 것을 보니 기분이 착잡하다. 포장도 안벗긴 저 양초를 누가 주워가지도 않는 걸 보니 풍요의 시대가 확실하다. 하지만 그 풍요가 비정상적인 이상한 풍요임을 실감한다.

348. 12월 14일. 月. 부산. 흐리다.

▲ 감성적 인간과 감정적 인간(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화내는 건 감정의 쓰레기 투기 행위

감정, 감상, 감성, 정서는 유사어지만 뭔가 다르다. 영어로 feeling, emotion, sentiment도 유사어이지만 뭔가 다를 것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감정과 감성은 겉보기엔 비슷한 낱말같지만 반대말이기도 하다. 감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감성적으로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뜻이다. 전자가 부정적이라면 후자는 긍정적이다. 누가 감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뭔가 상대방이 기분 나쁘도록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말한다는 뜻이지만 감성적으로 말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끌도록 말한다는 뜻이다. 완전히 반대말이다. 우리는 감성적 인간이 될 필요가 크다. 하지만 감정적 인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지만 감정적 인간이란 자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낸다. 화(火)란 감정의 불(火)이다. 불처럼 마음 속에서 일시에 울컥 솟아치는 감정이 분노(憤怒)다. 화를 내면 뚜껑이 열린다고 하는데 그만큼 머리에서 열받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머리는 차갑고 발이 따뜻한 두한족열(頭寒足熱)과 반대인 상태가 된다. 결국 상반신은 뜨겁고 하반신은 차가운 상태가 되어 음양의 순리적 흐름이 깨진다. 건강을 위한 기본 상태가 깨지는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감정의 쓰레기를 마구 상대방에게 버리는 일이다. 화를 당하는 사람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만다. 그 화를 안 받아 버리면 되겠지만, 화낸 사람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겠지만, 화내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그도 화낸 사람에게 화를 낸다. 그 것이 바로 말싸움이다. 말싸움은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진다. 서로가 화를 내며 감정의 쓰레기를 버리게 되고 결국은 서로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마는 꼴이다. 이제 서로를 더 미워하고 싫어하며 증오까지 하게 되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절대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는 말은 화를 내며 감정섞인 말로 감정의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설령 내가 그 감정의 쓰레기를 받아들여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더라도.

349. 12월 15일. 火. 부산. 맑지도 흐리도 않다.

▲ 사라져야 할 슬레이트 지붕(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석면보다 위험할지 모를 나노 쓰레기

한정식집 이름으로 백두정은 참 근사하다. 몇 번 가보았다. 너무 많은 음식이 나오기에, 버려질 음식들이 많기에 내가 좋아하는 한정식집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를 늘 지나치더라도 정이 가지 않는 음식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영업을 중지하더니 이제 곧 헐릴 기세다. 정든 음식점도 아니었건만 나무 판자 조각으로 멋지게 만든 저 예술적 간판을 못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섭섭했다. 알고 보면 백두정 한정식집보다 먼저 헐려야 집이 바로 저 슬레이트 지붕 집이다. 아직도 전국에 많다. 앞으로 정부에서는 단계적으로 없앤다고 한다. 저 슬레이트는 석면 슬레이트다. 석면과 시멘트를 배합하여 만든 석면 슬레이트는 우리 어릴 적부터 흔하게 보던 것들이다.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에서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바꾸었다. 도심에서도 작은 집들을 지을 때는 석면 슬레이트가 지붕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2009년부터 석면 슬레이트를 포함하여 석면으로 된 건축자재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 한 때 야외에서 저 슬레이트 지붕 조각을 불판으로 삼아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식한 짓이었다. 슬레이트가 부숴질 때 생기는 석면 가루가 폐로 들어가면 폐에 치명적인 병을 일으킨단다. 그래서 석면은 천연물질이지만 1급 발암물질로 규정되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석면 가루를 현미경으로 보면 날카롭게 깨진 유리처럼 삐쭉삐쭉한 모양으로 폐에 한번 박히면 빠져 나오지 않는단다. 그래서 석면이 들어간 건축자재로 지은 건축물을 허물 때는 특수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해체한다. 만들 때는 아무 문제 없다가 세월이 지나 헐려져 쓰레기가 되려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는 나노 제품들도 쓰레기가 될 때면 석면 제품처럼 문제가 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백만분의 일의 마이크로(micro) 수준인 석면가루보다 더 미세한 십억분의 일의 나노(nano) 수준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인체 안으로 에 더 잘 흡착될 것같다.

350. 12월 16일. 水. 부산. 밤에 추워졌다.

▲ 수백만 원대의 연결 코드(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하이엔드 오디오 세트와 황홀한 소리

동창회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 찰나에 후배가 선배 집에 같이 가잔다. 선배 집에 끝내주는 오디오 시설이 있으니 맥주 한 잔 하면서 음악 감상이나 하잔다. 귀가 솔깃한 제안이다. 과연 선배 집에 있는 오디오 세트는 끝내 주었다. 하나하나 단품이 중고품이라지만 개당 몇백만 원이란다. 다 합치면 기천만 원이다. 말로만 듣던 최고급 음향시설(High End Audio)이다. 앰프도 커다란 진공관으로 되어 있다. 이런 하이엔드 오디오 세트에서는 뒤에 전기 연결선까지도 따로 판다는 얘기를 들을 적이 있어서 선배에게 물었다. 이 것도 그런 것이냐고? 선배는 그냥 씩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후덕하게 보이는 선배가 손으로 든 저 연두색 케이블이 300만 원이란다. 두께가 비슷한 저 회색 케이블이나 청색 케이블도 그리 비쌀 것같다. 일반인들이야 그냥 아무 케이블을 써도 괜찮지만 오디오광들한테는 어떤 케이블로 기기들을 연결하느냐에 따라 음질 차이가 나므로 비싸고 좋은 것을 쓴다고 들었다. 선배가 이 오디오로 들려주는 엘튼 존의 <투나잇>과 무디 블루스의 <멜랑코리 맨>은 환상적이었다. 이 음악을 전에 들은 적이 있지만 저 하이엔드 오디오 세트가 내는 섬세한 음으로 들으니 처음 듣는 것처럼 황홀했다. 비디오 제품은 끝이 있지만 오디오 제품은 끝이 없단다. 오디오 세계에 빠져 들면 더욱 더 하이엔드의 황홀한 소리를 찾기에 점점 더 좋은 장비를 찾는단다. 그래서 오디오 매니어를 남편으로 둔 부인들은 좋을 리가 없단다. 오디오 취미를 둔 남자들은 큼직한 뭉텅이 돈을 오디오 장비와 시설을 구입하는데 쓰니 이를 좋아할 아내들은 없을 것이다. 나도 이런 오디오 세트를 갖춘 리스닝 룸을 갖추고 싶다. 여기서 소리의 황홀경에 빠지고 싶다. 아마도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만. 하지만 수억 원대의 오디오 세트가 내는 황홀한 소리보다 더 황홀한 소리는 바로 우리 가까운 일상과 주변에 있다. 비록 쓰레기가 난무하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평범한 세상은 소리까지도 소리마저도 참 아름답다.

351. 12월 17일. 木. 부산. 추우니 코가 간질거린다.

▲ 쓰레기 보고서 첫 번째 정리

쓰레기에 관한 정의와 인간의 사명

지금까지 이것저것 쓰레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을 쓰기도 하고 쓰레기와 간접적으로 엮이는 글을 접고 생각을 전반적으로 정리해야 하겠다, 일명 '쓰레기 보고서 정리 15제'다. 첫 번째 꼭지로 쓰려는 것은 쓰레기 문제에 관한 사명(使命, mission)이다. 그깟 쓰레기 가지고 뭔 사명이냐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이 생명체로 산다면 우리가 한 점 한 코에 걸쳐서 살아가는 생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의 영장인 호모 사피엔스이면서 생명체 중 유일하게 쓰레기를 배출하며 사는 ‘호모 러비쉬’이기에 쓰레기 문제에 관해 우리한테 맡겨진 임무인 사명이 없을 수 없다. 그 사명이란 무엇일까? 우선 쓰레기에 관한 정의를 해야겠다. 이 글에서 쓰레기란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이다. 쓰레기는 가정에서 버리는 생활 쓰레기나 길거리에 널려진 쓰레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동차가 갈 때 대기 중에 버려지는 매연도 쓰레기이고, 먼지-미세먼지-초미세먼지도 쓰레기고, 원자력 발전에 따른 방사선도 쓰레기고, 지천에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찌꺼기 등 온갖 유해 물질도 쓰레기고 하물며 분노하며 벌컥 화를 내는 것도 감정의 쓰레기다. 쓸모있는 것들이 에너지라면 쓸모없어 버려진 쓰레기는 엔트로피다. 무(無) 엔트로피 삶은 불가능하고 저(低) 엔트로피 삶은 우리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쓰레기들을 덜 배출하며 살아야 한다. 하는 수 없이 배출하였다면 우리는 이를 잘 쓸어 담아야 마땅하다. 쓰레기란 쓸어져 담길 것이다. 빗자루로 쓸어져 담긴 부스러기가 줄어서 된 낱말이 쓰레기다. 그렇다면 쓸모없어 할 수 없이 버려진 부스러기들을 모아 담아 쓰레기로 만들어 이를 깨끗하게 처리하는 것이 쓰레기 문제에 관한 마땅한 사명이자 당연한 미션이 된다. 물론 대기 중으로 버려진 쓰레기들은 쓸어져 담겨져 쓰레기가 될 수 없다. 이런 불가피한 엔트로피를 덜 배출하며 살되, 쓸어져 담겨진 쓰레기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화를 냈다면 이를 추스르는 것도 그런 맥락의 노력일 것이다.

352. 12월 18일. 金. 부산. 고교 동창회 가는 길이 어둡다.

▲ 쓰레기 보고서 두 번째 정리

불가능하지만 성찰해야 할 방향성

전의 글에서 쓰레기에 관한 정의와 쓰레기 문제에 관한 인간의 핵심 사명을 압축 요약 정리했다. 이제 이 사명을 어떤 방향으로 전개해야 할지 이야기할 차례다. 이는 쓰레기 문제 등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의 방향성이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해내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가려는 방향이다. 그 첫 번째는 경제를 넘는 생태로의 방향이다. 즉 경제주의를 넘어(beyond) 생태주의로 가는 방향성이다. 여기서 넘는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를 감싸며 넘는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실 이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인간의 기본 욕구들 중에 하나인 물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 물욕에 의해 문명을 이루며 잘 먹고 잘 사는 경제주의 세상을 이룰 수 있었다. 보다 좋은 집에 살고 싶고 보다 배불리 먹고 싶고 보다 근사한 옷을 입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동굴에서 돌을 깨며 살고 있을 것이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전쟁과 살인을 불사하는 것도 물욕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욕 덕분에 인류는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생태를 생각하며 살아온 적은 거의 없었다. 점점 더 경제에 대한 생각이 굳어져 갔다. 그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좀 더 많은 돈을 벌어 물질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고 싶은 것 역시 물욕과 관계있으며 이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어찌 물욕을 달성하는 경제주의를 넘어 생태주의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겼다지만 둘 다 경제주의일 뿐이다. 공산주의 계획경제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냐? 물욕 해결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지금 좌우로 갈린, 인간 중심의 경제주의로는 쓰레기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불가능한 게 분명할 방향성이지만 그래도 너무 경제만 생각하지 않고 생태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성에 관해 가만히 돌아 볼 때 쓰레기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우리가 다음에 이룰 것은 생태화다. 지금 불가능해 보여도.

353. 12월 19일. 土. 부산→서울. 맑지는 않다.

▲ 쓰레기 보고서 세 번째 정리

생태계 여건에 감사해야 할 방향성

바로 전의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방향은 경제를 넘는 생태로의 전환이었다. 두 번째 방향은 인간을 넘는 생명으로의 전환이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막강하며 영민한 생명체다. 지질학적으로 인류세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되어 인간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생태계 침범을 특징으로 하는 지질학적 시기인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맞게 되었다. 인류세는 인류세(人類勢)가 되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가 되었다. 폭력(rape)을 일삼는 폭력적(rapicious) 인간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인간의 무한한 절대적 능력으로 폭력을 일삼을 수 있을까? 호모 라피엔스는 호모 러비쉬가 되었다. 엄청난 쓰레기를 버리고 살므로 인간은 생태계에 폭력적 만행을 저지르며 사는 유일한 종이다. 먹이를 죽이는 하이에나의 폭력은 단지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한 것이지만 인간은 식지않은 물질적 탐욕으로 폭력을 저지른다. 결국 쓰레기의 양은 무한히 늘어나고 있다. 쓰레기는 생명의 숨통을 끝장날 때까지 조여 오고 있다. 과연 지구에서 약 300만 년 정도 살았던 인류가 1억 년 가까이 살았던 공룡만큼 지구에서 살 수 있을까? 아직 혈기왕성한 청년기에 놓인 우주에서 하나의 생명체(Gaia)인 지구는 어머니처럼 자애롭지도 숫처녀처럼 연약하지도 않다. 노자가 단정했듯이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天地不仁). 이제 인간중심의 인간주의를 거슬러 역(逆)인간주의를 생각할 때다. 인간이 연약한 자연 환경을 보호한다는 인간중심적 환경 관점에서 벗어나 지구 생명체가 인간에게 마련해준 생태계의 여건에 감사해야 한다. 생명체 지구인 가이아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생명체인 인간이 같이 살 수 있는 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생명주의란 단지 인간의 생명일 수 만은 없다. 더 포괄적인 온갖 생명들을 넓게 바라보고 생명의 소리를 조용히 듣는 것이 온전한 생명주의다.

354. 12월 20일. 日. 서울. 온종일 흐리니 집에서 빈둥댔다.

▲ 쓰레기 보고서 네 번째 정리

실존보다 폭넓게 보아야 할 방향성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세 번째 방향은 실존을 넘는 생존으로의 전환이다. 실존은 실존주의와 관련된다. 철학의 역사에서 실존주의는 과학주의, 실증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객관주의, 논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여기서 실존이란 일반적 본질이 아닌 개별적 존재다. 즉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 인간의 독자적 실존이다. 인간에게는 일반적 보편적 객관적 정신보다 개별적 독자적 주관적 인간 정신이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사회는 개별자인 나와 너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달리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했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개인의 실존이 인간의 본질보다 앞서며(L'existence precede l'essence),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은 자기의 존재 방식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 만을 중시한다. 다른 생명들의 존재에 관해서는 무시하고 무지하다. 결국 실존주의는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에 의해 사그러지며 이후 해체주의 철학이 대두되었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에 의한 해체주의 철학은 복잡난해하다. 쉬운 걸 어렵게 설명한다. 실존주의에 대한 전환인 생존주의는 단순간명하다. 마땅한 걸 당연하게 설명한다. 생존(生存)은 살아남는 생존(survival)이 아니라 전반적 생명체들의 존재다. 생존은 실존보다 앞선다. 실존주의는 타자와 연결된 개인의 실존을 중시하며 나와 너를 따지지만 생존주의는 나와 너도 걸쳐 있는 생태계를 생각한다. 이 생태계에서 쓰레기를 버리면서도 살아가는 나의 실존은 하나의 복잡한 생태계의 그물코에 걸쳐 살아 가는 존재일 뿐이다. 실존주의를 넘는 생존주의는 그물코에 걸친 인간의 왜소함이나 부족함, 연약함을 깨닫고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진화론에서의 적자생존처럼 경쟁적이거나 치열하지 않다. 생존주의는 이 세상을 온전히 살아가는 부드러운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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