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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거부하는 자를 질질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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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거부하는 자를 질질 끌고 간다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6.11.28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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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토요일인 엊그제 오후 멀리서 긴한 손님이 찾아온 바람에 서면 거리에 나가질 못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다섯 번째이고 규모가 제일 클 것으로 예상된 집회여서 더 아쉬웠다. 앞서 두어 차례 집회에 참가하긴 했지만 정작 이번엔 나가지 못하게 되니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아닌 죄책감이 느껴졌다. 광화문이나 부산 서면 거리, 혹은 광주 금남로의 집회장으로 국민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는 힘 중의 하나는 ‘역사의 현장’에 빠져선 안 된다는 의무감일 터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집회 모습을 TV로 지켜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할밖에. 진눈깨비가 내리는 광화문 거리엔 일찍부터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서면에도 우비를 쓴 시민들이 중앙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광화문과 서울광장, 세종로 일대를 가득 메운 촛불이 장관이었다. 서울에만 150만 명, 부산 10만여 명을 포함해 지방 40만 명, 도합 190만 명이 참가했다고 실황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알려주는 소리를 들었다. 저녁 여덟 시가 되자 일제히 촛불이 1분간 꺼지면서 광화문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는 장면을 지켜볼 때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시민들이 거대한 대열을 이루어 청와대 쪽으로 행진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번엔 청와대를 좌우로 포위하는 형국으로 행진이 펼쳐졌다고 한다. TV 카메라가 시위대에 둘러싸인 청와대의 모습을 원경으로 비추어 주었다. 청와대는 괴괴한 어둠에 짓눌려 있었다. 얼핏 유령의 성처럼도 보였다. 대통령은 관저에서 자신의 퇴진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국민의 함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며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글쎄, 대통령은 지난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한 이후 20일이 훨씬 넘도록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질 않고 있다. 국민과 숨바꼭질 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 엄중한 시국에 청와대에 꼭꼭 숨어 있는 게 과연 정상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시민들이 청와대를 둘러싸고 행진하는 장면을 보자니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서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청 태종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에게 보낸 국서의 일부이다. 주지하다시피 명과 청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을 내쫓고 들어선 인조의 서인 정권은 숭명론(崇明論)에 치우친 나머지 냉엄한 동북아의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한 채 새로이 떠오르는 여진족의 후금(後金=淸)을 오랑캐라 능멸하고 적대시했음은 역사가 말하는 대로다. 그랬으면 국방이나 튼튼히 하던지, 아무런 실력도 없이 큰 소리만 치다가 분노한 청 태종이 20만 대군을 휘몰아 압록강을 넘어오자 변변히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줄줄이 무너져 열흘도 안 돼 도성까지 빼앗겼다. 인조는 황황히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으나 적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것. 겹겹이 포위돼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인조에게 청 태종이 항복하라며 보낸 최후통첩이 바로 이 글이었다. 청와대를 둘러싼 150만 시민의 대열을 무엄하게 오랑캐 군대에 비유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고립무원으로 청와대에 갇혀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가 병자호란 당시의 인조와 비슷한 것 같아 인용해 본 것뿐이다. 지금 대통령은 남한산성처럼 옹색한 청와대를 벙커 삼아 국민에 맞서 농성전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시간을 끌면 국민들이 지쳐서 주말 시위를 중단하고 행여 반전의 기회가 생기지나 않을까 요행수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민들은 결코 빈손으로 회군하지는 않을 것이고 대통령은 삶을 거저 누릴 수 없다. 지난 두 달 가까이 대통령에게 쏟아진 그 숱한 의혹과 비난을 여기서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걸핏하면 쏘아대던 ‘레이저 눈빛’ 속에 감춰진 박 대통령의 허상을 모르는 국민은 이제 아무도 없다. 대통령은 그 동안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이미 다 들었다. 대통령에게 쏟아진 야유와 경멸도 이미 태산을 이루지 않았는가. 그는 현직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범죄 피의자 처지로 전락한 터다. 지난 3년 9개월 동안 대통령이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을 자격 없는 한 민간인 여성에게 고스란히 상납했을 뿐 아니라, 온갖 구질구질한 이권을 빼먹고 재벌을 갈취하는 일에 ‘심부름센터 직원’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모든 비리가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이후에도 계속되는 대통령의 답답한 처신이다. 박 대통령은 두 번에 걸쳐 국민에게 사과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 사과는 진실을 은폐하면서 책임 모면에 급급한 언사로 채워져 국민의 부아만 돋우지 않았나. 사과에 응당 따라야 할 후속 조치도 없었다. 이 판국에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려는 꼼수만 드러내 국민의 매를 더 벌지 않았나. 검찰의 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수사를 성실히 받겠다던 대국민 약속을 걷어찬 대통령이다. APEC에도 총리를 대신 내보내야 했던 처지였으면서도 뒷구멍으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졸속 처리했던 대통령이다. 국민은 나랏일에서 손 떼고 하야하라는데 국정 역사교과서를 배포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대통령이다. 글쎄, 그런 무리수를 두더라도 국민을 직접 상대나 했으면 좀 나으련만 본인은 구중심처 돌구멍 같은 청와대 관저에 꼭꼭 틀어박힌 채 장관이나 닦달하고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이 만들어낸 허섭스레기는 자신이 치워야 하지 않는가. 즉각 퇴진을 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국민에게 돌팔매를 맞을 때는 맞더라도 얼굴을 보이고 수습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나. 3주가 훨씬 넘도록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은 채, 몸뚱이는 내놓고 풀 섶에 머리만 숨긴 까투리 꼴이니 참으로 무능하고, 참으로 비겁하고,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도대체 국민에게 응석을 부려도 유만부동이지 어찌 이런 대통령이 다 있을까 싶다. 오죽하면 대통령에게 하야 결재를 내려주도록 최순실을 일시 석방하라는 농담이 나오겠는가. 청 태종의 화법을 빌려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는다. 죽기를 원하는가. 그럼 돌구멍 같은 청와대에 그대로 숨어 있으라. 국민과 싸우기를 원하는가. 그럼 국민이 그 돌담을 타고 넘어가 끌어낼 것이다. 지키기를 원하는가. 지킴이 끝날 때까지 국민이 청와대를 포위할 것이다. 국민이 지쳐서 집회와 시위를 끝내 주고 그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임기를 채우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무능한 군주였던 인조는 마지막 순간 어깨를 드러낸 푸른 죄수복을 입고 남한산성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삼전도에 나가 높은 단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 꿇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삼고구궤(三叩九跪)의 예로 항복했다.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통한과 수치의 장면이지만, 청나라 군사에게 도륙당하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군주로서의 마지막 의무를 행한 것이었다. 대통령에게 권고한다. 그동안 저지른 그 숱한 허물을 이제라도 갚아야 하지 않는가. 이 나라 대통령의 직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는 해야 하지 않는가. 탄핵을 당하든, 감옥에 가든 국민에게 직접 나서라. 그래서 국민에게 진심을 다해 사죄하고 거취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라. 그게 박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감당해야 할 ‘국정 과제’다. 대통령이란 위치는 두고라도, 한 인간으로서 누추한 모습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면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고 모셔 온 국민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대통령은 철옹성처럼 닫아 건, 하지만 사실은 사상누각인 청와대의 대문을 즉각 열어야 한다. 그리고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국민의 처분에 따르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으라. 마지막으로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라. 두려워 말고 나오라.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한 마디를 대통령에게 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겠다. "운명은 순응하는 자는 태우고 가지만, 거부하는 자는 질질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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