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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어디까지 가봤니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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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어디까지 가봤니 part 1
  • 취재기자 김경민
  • 승인 2013.01.21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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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결심하다

2009년 12월 31일의 늦은 밤.
그 해도 매년 돌아오는 연례 행사처럼 TV 앞에 앉아, 나는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지상파 방송사들의 연기 대상을, 채널을 돌려가며 시청하고 있었다. 어느덧 시계는 자정을 부지런히 재촉했고, 방송사들은 일제히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 다운에 돌입했다. 이어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다. 다시 시작되는 새해에 사람들은 마치 희망을 다 잡은 듯이 열광했고, 아나운서들은 상기된 톤으로 마이크를 통해 국민들에게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대본을 읽었다. 폭죽이 터지고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었다.

그 해, 연기 대상을 누가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밤, 제야의 종소리는 내게 스물다섯이라는 수학적 나이만 선물한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주제에 경종을 울리게 했다. 이십대 중반, 이제 더 이상 사회는 내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고, 내가 사회와 타인에게 어른이라는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고 자유롭고 싶듯이, 사회도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동기(특히 여자 동기)들은 벌써 졸업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취업을 위한 인턴, 자원봉사, 자격증 시험 준비 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다 할 스펙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내 이력서에 기재될 수 있는 항목은 지방대 학력밖에 없었다. 나만 뒤처지고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지만, 노력하지 않는 내 젊음은 안일하게 낭비된 채로 방치될 뿐이었다. 평소에 ‘언젠가 한번은 몇 년 정도 외국 생활을 하게 될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내겐 전환점이 필요했고 지금이 바로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느꼈다. 마침 주위 사람들을 통해 몇 번씩 주워듣다시피 했던 ‘워킹홀리데이’라는 단어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즉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회원 수가 가장 많고 활동이 활발한 워킹홀리데이 관련 카페에 가입했다. 도서관에서 관련 책자도 많이 봤지만, 역시 커뮤니티 카페가 내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준비부터 귀국까지의 모든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어서 굉장히 유용했다. 또 나는 더 많은 고급 정보를 얻기 위해 부산 내 유명한 유학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치 유학을 고민하는 학생처럼 전문가들에게 상담을 받고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유학원의 잠재고객인 나를 잡기 위해서 깨알 같은 정보를 쏟아냈고, 나는 열심히 고급정보를 필기해가며 들었다. 나중에 그러한 정보들이 초반의 호주 생활에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알아보니, 워킹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는 호주, 캐나다, 일본, 독일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영어권 국가로 인원 제한이 없고, 영어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 나라는 호주가 유일했다. 호주라는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개인적으로 괜찮았다는 것도 역시 플러스 요인이었다.

외국을 나가려면 일단 여권과 비자가 필요하다. 여권은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본인 확인을 위한 ID카드이고, 비자는 가고자하는 나라의 입국 허가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서류이다. 특히 비자는 국가와 입국 목적에 따라, 학생비자, 워킹비자, 체류비자, 사업비자 등 매우 종류가 다양하다.
앉은 자리에서 워킹 비자 신청을 하고, 다음 날 구청에서 여권을 만들고, 항공 예약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어머니께 “호주라는 나라에서 인생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부탁이 있는데 다음 학기 등록금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럼 호주에서 돌아오는 그 해의 등록금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자신있게 제안했다. 어릴 때부터 갈림길에 설 때면 항상 결정권을 내게 주셨던 어머니셨지만, 갑작스러운 아들의 통보에 많이 당황해 하셨다. 제대한 지 1년밖에 안 된 아들이 또 출가를 하겠다고 하니 반가울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설득 끝에 결국 허락을 하셨고, 나는 편한 마음으로 출국일이 있는 4월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준비 기간이었던 3개월 동안이 가장 아쉽다. 당시 비자신청과 항공예약까지 다 마쳤던 상황이었지만 외국 생활을 한다는 실감이 아직 없었던 탓이었을까. 나는 영어 준비에 굉장히 소홀했다. 'grammar in use'라는 책으로 설렁 설렁 훑어보기만 했다. 무슨 겉멋이 들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나 4월에 호주가”라며 “나는 이제 외국 물 먹으며 아무 연고 없는 그 광활한 대륙에 홑몸으로 도전하는 진취적인 젊은이야”라고 광고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러나 허세병에 젖어 영어 공부에 소홀했던 대가는 첫 날, 시드니 공항에 내리자마자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드디어 출국하는 날. 가족의 헤어짐, 이런 비슷한 슬픈 감정을 전에도 한번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군 입대할 때와 비슷했는데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애써 좋은 날이라고 마음을 추스르며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출국 게이트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우리는 경상도 가족답게 건조하게 뒤돌아섰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미처 건네주지 못해 게이트 밖으로 다시 나왔는데 어머니가 벤치에 앉아 울고 계셨다. 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 나도 울컥했지만 씩씩한 모습이 좋겠다 싶어 핸드폰만 건네주고 웃으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좌석에 앉아 창문을 보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고동치는 가슴이 ‘자, 이제 시작이야’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항공 일정인 나리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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