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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개인과 집단의 불화: 한국은 초경쟁 사회, 초개인주의 사회④: 물질 지향, 인간성 상실, 사욕주의 사회에서 희망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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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개인과 집단의 불화: 한국은 초경쟁 사회, 초개인주의 사회④: 물질 지향, 인간성 상실, 사욕주의 사회에서 희망 찾기
  • 정태철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4.12.0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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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회복: 인문학으로 교양, 인격, 덕 쌓기
마음의 평화: 충동, 쾌락, 물욕으로부터의 해방
공동체 회복...희생하고 배려하라, 사랑하고 협력하라
“남과 비교하지 마라. 내가 세상의 기준이다”
*편집자주: '개인과 집단의 불화(不和)...한국은 초경쟁 사회, 초개인주의 사회③: 집단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이기주의(//liliumpumilum.com/news/articleView.html?idxno=37746)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의 개인주의는 정부 수립 후 겨우 기지개를 켰으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개인의 권리, 창의성이 폭발하여, K반도체, K드라마, K팝, K푸드, K뷰티, K방산, 최근의 K문학 등으로 한국을 일약 세계 10대 강국으로 부상시켰다. 다들 K자부심에 심취하고 있을 때, 한국도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초경쟁 사회로 진입하면서, 초개인주의, 혹은 극단적 이기주의 사회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저출생, 의료 사태, 학폭, 학부모 갑질, 고독 사회, 물질 지향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는 급기야 세계 1위 K자살률로 벼랑 끝에 몰렸다. 칼럼리스트 강석천은 잘 나가는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지 모른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히는 ‘쇠퇴강박증’ 공포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인간성 회복: 인문학 책읽기로 교양, 인격, 덕 쌓기

초경쟁과 초개인주의라는 망령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는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로마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키케로는 인문학을 ‘인간다움(후마니타스)’으로 정의했다. 서양 인문학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 대학에 해당하는 ‘플라톤 아카데미’가 건립되면서 발전했다고 한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교육목표는 진선미인데, 여기서 ‘진’은 나에게 진실한 삶, ‘선’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도덕적 삶, ‘미’는 아름다운 삶과 의미 있는 죽음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살자’는 게 인문학 공부의 목적이었다.

‘인간답게 살기’는 곧 인문학적 소양, 인간적 가치, 인간성을 높이는 것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교양, 인격, 덕 쌓기’로 요약된다. 교양, 인격, 덕은 문학, 역사, 철학으로 집약되는 인문학 공부로 얻을 수 있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인문학을 배제하고 거부한 역사적 사례로 공산주의와 히틀러를 꼽았다. 이들이 만든 국가들은 인간적 자유와 이성적 사유를 거부했기 때문에 스스로 정신적 빈곤과 국가적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과학자 장대익 교수는 OECD가 전 세계 만 15세 미만 학생들의 읽기, 수학, 과학 능력을 3년마다 평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한국은 거의 매번 전 세계 5위권 안에 드는데, 같은 평가에서 한국은 수학과 과학의 흥미 정도와 가치 정도(수학과 과학이 어디에 써먹는지를 아는 정도)는 매번 꼴찌를 맴돈다고 했다. 한국 학생들은 흥미도 없고, 어디에 써먹을지도 모르면서, 문제 풀이 기술자처럼 과학과 수학 점수만 높다는 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또한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국가가 됐지만 한국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게 통계적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장 교수는 우리 한국이 교육열은 높고, 과학과 수학에 흥미는 없으면서도, 책도 안 읽고 문제만 잘 푸는 나라여서, 매우 천박한 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는 한국이 잔기술은 높을지 모르지만 교양, 인격, 덕은 그렇게 높은 수준의 나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초경쟁 사회와 초개인주의 사회 늪에 빠진 한국에서 희망 찾기 프로젝트의 시작은 인문학 책읽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스마트폰, TV, 영화 등 ‘스크린’을 가진 기계의 유튜브, 숏폼류(類), 소셜미디어, OTT 중독에서 벗어나 ‘종이책’으로 돌아가야 한다. 디지털 기기를 잠시 내려 놓자는 '디지털 디톡스'는 이미 전 세계적 관심사로 대두된 지 오래다(필자의 다른 칼럼 참고, ). 디지털 디톡스가 물질주의, 경쟁, 이기주의, 비교의 노예로부터 인간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며, 동시에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지하철이나, 심지어 서울 강남대로를 걸으면서 스마트폰에 머리 박고 무엇에 홀렸는지 앞도 안 보고 걷는 좀비 같은 군상(群像) 속에서는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 충동, 쾌락, 물욕으로부터의 해방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인간은 자기 손으로 짠 의미의 그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산다”고 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저질러서 남의 화를 돋우고, 그래서 서로 싸우게 되니, 인간은 자신이 짠 그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형국이란 의미다. 우리는 남에 대한 모욕, 배신, 증오, 적개심의 그물을 자기 스스로 짜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OECD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람은 이웃, 지인,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OECD 평균 이하다. ‘직장 선택 시 소득과 안정성이 중요하다’고 대답한 한국인 응답자는 전체의 81%였으며, OECD 평균은 53.7%였다. 47개 조사 대상 국가 중 한국보다 이 응답이 높게 나온 나라는 에티오피아, 루마니아, 이집트 3개국뿐이었다고 한다. ‘직장 선택 시 돈 대신 보람과 동료’를 택한 한국인 응답자는 16%로 조사 대상 국가 중 최하위로 나타났다. 같은 질문에서, 스웨덴은 76%, 일본은 50%, 대만은 35% 등으로 우리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직장 생활에서 물질적 이해타산이 앞서는 한국인의 ‘물질 지향적 사고방식과 인간관계’는 결과적으로 저신뢰, 초경쟁, 고(高)갈등의 초개인주의 싸움판으로 한국 사회를 몰아가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의 <조용한 혁명>에 소개된 2008년 세계 가치관 조사 결과도 한국인의 물질 지향성을 잘 보여준다. 잉글하트는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스웨덴, 미국, 일본은 물질 지향적 성향이 낮아지고, ‘탈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냈다고 했다. 바로 비물질적 가치관(사랑, 협력, 배려, 존중 등)이 선진국 사회변화의 원동력이라는 게 잉글하트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선진국들의 비물질주의 가치관 선호 비율이 조사 대상자의 45∼48%인데 비해, 한국은 14∼15%로 나타났다. 이를 보고, 잉글하트는 한국은 선진국이면서 여전히 물질 지향적 가치관을 가지는 ‘예외적 국가’라고 표현했다. 이런 결과는 한국의 의대와 로스쿨 열풍, 물질주의 대물림, 명품 소비 등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으며, 반대로 한국인이 왜 가치지향적이고 비물질적인 인간 교양과 품위를 배우는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지를 보여준다.
선진국은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갖는 게 보통인데 한국은 선진국에 진입했음에도 여전히 물질 지향적인 가치관을 갖는 예외적인 국가라고 한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선진국은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갖는 게 보통인데 한국은 선진국에 진입했음에도 여전히 물질 지향적인 가치관을 갖는 예외적인 국가라고 한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도 그의 저서 <바른 행복>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이룬 양적 풍요가 인간 삶의 질을 떨어트린다고 지적했다. 하이트는 이를 ‘풍요의 역설’이라 불렀다. 풍요는 인간의 본능적 충동을 자극하는데, 하이트는 세 가지 이론으로 인간의 충동적 욕심을 설명했다. 하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인간은 도파민이 분비되는 행동을 계속하게 된다는 심리학자 스키너의 이론이다. 두 번째, 인간은 참으면 나중에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인내심이 부족해서 즉각적인 지금의 작은 만족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는 이론인데, 이를 ‘마시멜로 테스트’라고 한다(미국 사회심리학자 월터 미쉘 이론). 세 번째는 애드가 알랜 포의 <비뚫어진 마음의 악귀>라는 시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 안하려고 할수록 더 생각 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를 ‘정신적 통제의 역설적 효과’ 내지는 ‘강박관념’이라고 한다.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해야 이러한 충동적인 욕구, 쾌락, 물욕으로 질주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인내심과 자제력으로 평정심을 찾을 수 있을까? 하이트는 “우리 삶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부처의 말을 교훈 삼아 ‘명상’으로 마음을 안정시킬 것을 권한다. 그는 명상은 돈이 들지 않는 명약이라고 했다. 명상을 통해서 고통의 시작인 집착을 버리라고도 했다. 어떻게 명상해야 할까? 서점에 가면 의외로 명상에 관한 책들이 많다. 명상을 이끌어 주는 모임도 있다고 한다. 의지만 있다면 명상은 배울 길이 주변에 많다. 하이트가 제안하는 두 번째 마음의 평화를 찾는 방법은 충동, 쾌락, 물욕의 대안을 찾으라는 것이다. 하이트는 재물은 더 많은 재물을 원하게 하고 이긴 자는 더 많이 남을 이기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물질적, 신체적 쾌락의 대안으로 ‘비물질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자발적 협동, 배려, 감사 행동을 자주 하라고 했다. 우리는 명품과 같은 과시적 소비를 하게 되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국가 간 군비 경쟁처럼 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고 싶은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책읽기, 걷기, 대화하기, 봉사하기, 외국어 배우기, 악기 배우기, 좋은 강의 듣기, 사색하기와 같은 비물질적 취미 행동은 남 시선과 무관하므로 충동과 쾌락과 물욕의 좋은 대안이 된다.

공동체 회복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1998년 2차에 걸쳐 1001마리의 소를 북한으로 보냈다. 당시 한국의 한 수의사는 선물 받은 소가 관리되고 있는 북한의 집단 농장을 몇 차례 방문해서 소의 건강을 체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들이 점점 죽어가고 있더란다.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자기 소’가 아니므로 적극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는 과도한 집단주의 사회의 무기력한 개인 생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만큼 개인의 소유권, 사유재산은 인간에게 중요하다. 로크는 자유롭게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개인주의가 집단주의를 외면하면, 다시 말해 ‘나’와 ‘우리’의 불화(不和)를 부추기면, ‘나’와 ‘우리’는 공멸한다. 그게 파괴적 개인주의, 즉 이기주의다. 전쟁, 침략, 투쟁, 대립이 그 예시다. 반면에, 개인주의가 ‘나’와 ‘우리’의 조화를 꾀하면, 개인주의는 창의력과 생산력으로 승화한다. 그 결과가 과학 혁명, 산업혁명,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불려준 산업화를 통해 한국도 개인주의를 진전시켰지만,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에 다른 서양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예외적’으로 물질 지향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공동체적 가치를 공유하려는 서양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어느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자녀 교육의 덕목 중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을 중시한다는 한국의 응답자 비율이 한국이 세계 최하위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집 또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 19세에서 39세 사이를 '고립/은둔 청년'이라고 하는데, 정부가 지난해 실태 조사로 추정한 고립/은둔 청년이 54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시가 따로 조사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고립/은둔 청년은 '학교나 동네에서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당한 경험(조사 대상의 57.2%)', '부모가 심하게 때리거나 꾸짖고 모욕했던 경험(51.2%)'이 있다고 한다. 가족과 학교와 동네가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고 있다. 이는 한국인에게 타인은 어울려 살고 공감하는 대상이 아니라 싸워 이겨야 하는 ‘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공동체와 개인의 연대 의식이 소실(没有了)되고 있다. 최근 언론에서는 서울대가 교육 인재상을 ‘도전과 공감’으로 설정했다고 보도했다. '도전'은 AI 시대에 서울대생들이 지녀야 할 시대적 정신 자세인 것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공감'은 왜 포함됐을까? 그 이유는 서울대가 분석한 서울대생 단점으로, 소통 능력이 부족하고, 협업 능력이 없으며, 이기적이고, 나르시시즘(자기애)과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등 전반적으로 인간다움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대는 인재상으로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공감을 내걸고, 공동체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 따뜻한 사회를 위한 인재를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정년퇴직 후 부산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평소 조용한 시골 생활을 동경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에 이름 없는 5층짜리 허름한 아파트를 하나 월세로 얻어서 연구실을 차렸다. 그리고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3도(都) 4촌(村) 생활(1주일에 3일은 도시에서, 4일은 시골에서 생활하기)을 4년째 이어가고 있다. 정적이 감도는 조용한 아파트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다른 문제는 없었으나, 앞집이 현관문을 닫으면 ‘쾅~~~’하고 터지는 소음과 이어지는 아파트 벽이 흔들리는 진동이 나의 수십 년 아파트 생활 역사상 처음 겪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아마도 아파트가 싸구려 재료와 엉성한 공법으로 부실하게 지어진 게 소음과 진동의 원인인 듯했다. 이사 직후부터 그 굉음과 진파에 화들짝 놀란 나는 현관문을 안에서 닫을 때는 문을 천천히 살짝 끌어서 닫았고, 외출할 때는 문을 밖에서 천천히 살짝 밀어서 닫았다. 그러면 문닫는 소리는 안 나고 도어락 잠기는 소리만 ‘스르륵’ 났다. 그런데 윗집, 아랫집 모두 현관문 닫는 소리를 나처럼 내지 않는 듯한데, 유독 앞집 사는 사람(몇 명이 사는지도 모른다)은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 아파트를 흔들고, 동시에 공포의 대포 소리를 냈다. 그 집 문을 두드리고 현관문 좀 살살 닫아 달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의 ‘실험’을 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통상적 아파트 층간 소음보다 지속시간은 짧아도 순간적 고통 지수가 훨씬 강한 ‘현관문 대포 소리와 진동’을 앞집에 사는 ‘한 시민’은 1∼2주, 혹은 늦어도 한 달 만에 스스로(내가 말로 힌트를 주는 ‘외부 자극’ 없이) 깨닫고 살포시 문을 닫는 공감 능력을 보여준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런데 그런 일은 무려 3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4년째 하루에도 몇 번씩 대포 터지는 소리와 진동이 ‘쾅~~~웅~~~’ 일어나고 있다. 요새는 ‘쾅~~~웅~~~’ 소리가 나면, “저놈은 언제 인간이 되나?” 하고 험한 말이 나올 지경이 되면서, 내 실험 가설은 처참하게 부정됐다. 이제는 외부 자극(강력한 항의)이 있어야 사람은 공공 도덕에 대한 공감 능력을 깨우친다는 실험 가설로 바꿔 볼까를 고민 중이다. 한국에서 공동체 회복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한국에서 작은 비율이 아닐 것이다. 

희생하고 배려하라

TV 어르신 토크쇼 ‘황금연못’에 어느 90대 할머니가 출연했다. 그분은 신혼 시절에 시댁 식구 14인의 밥을 가마솥에 장작불로 지어야 했다고 한다. 대략 1950년대 후반 내지는 1960년대 초반이었을 그 시기는 대전 변두리였던 우리집도 가마솥으로 장작불을 지펴서 밥을 했다. 시집살이 첫날, 그 새댁은 어렵사리 밥을 다 지은 후, 공기에 밥을 퍼서 12그릇째 담고 보니, 두 그릇을 더 담을 밥이 없더란다. 난감했던 새댁은 이미 담았던 12그릇을 다시 가마솥에 모조리 붓고, 14그릇을 만들기 위해 조심조심 양을 조절해서 겨우 14그릇을 딱 맞춰 밥상에 올려놓으니, 온 전신이 땀에 젖었고, 눈이 핑핑 돌더란다. 그런 새댁 모습을 내내 지켜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시어머니였단다. 시어머니는 “아가야, 이제부터 밥은 내가 짓겠다. 너는 반찬만 만들어라”고 하시고는 그다음 날부터 실천에 옮겨서, 시어머니와 새댁 며느리가 힘을 합쳐 힘겨운 대가족 살림을 이어갔단다. 이 에피소드는 당시에 그런 시어머니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믿기 어려운 미담이었다. 한 집단이 잘되려면 서로 배려해야 한다. 시집살이가 엄격했을 1960년대에도 그런 희생을 마다않고 며느리를 배려한 시어머니가 있었다. 아마도 그 할머니 집안은 그런 집안 전통으로 자손들 모두가 지위 고하(高低), 재물 다소(大小)를 불문하고, 교양과 인격과 덕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 이 사회 곳곳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으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학 시절 어느 여름 방학 때였다. 나와 친구들 5명은 충남 보령 앞바다 원산도로 캠핑을 갔다. 그런데 저녁 무렵 도착 순간부터 억수로 비가 왔다. 가지고 간 유일한 5인용 텐트 1개를 치고 배낭 다섯 개를 안으로 들여놓았으나, 텐트 구석구석 사방으로 비가 스며들었다. 우리는 비 안 새는 텐트 가운데로 배낭을 모아놓고, 배낭 더미를 중심으로 방사형(蔓延形)으로 비좁게 둘러앉아 배낭 더미에 등을 대고 떨어지는 빗물을 피해 몸을 오그린 C자형이 되어, 밤새 새우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침에 비가 개어 고단한 몸을 일으켜 보니, 한 친구가 없었다. 없어진 친구를 찾기 위해 텐트 문을 열었더니, 그 친구는 텐트 앞에서 우산을 받치고 쪼그리고 앉아 군대에서 불침번 서듯 밤을 지샜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내가 나가 있으면, 너희들이 그래도 편히 잘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우리는 그 친구의 희생정신에 “짜식!” 하면서 어깨를 치며 진한 우정을 느꼈다(그때는 우리나라에 허그 문화가 없었다). 나는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한 사람의 ‘솔선수범 희생’이 집단을 구할 수 있다는 강렬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그 교훈은 교육자 생활 32년간 나의 금과옥조였다. 아름다운 희생을 실천한 친구는 직장에서 은퇴 후 느지막이 목사가 되어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사랑하고 협력하라

연예인과 같은 '원빈'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의 유튜브 말씀 중에는 백혈병에 걸린 시한부 5세 아이 얘기가 있다. 그 아이는 평소에 자기가 20세까지 살게 되면 소방관이 돼서 사람들 생명을 살리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는 사실 생명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 죽음의 시각이 다가오자, 아이 어머니는 인근 소방서장을 찾아가 죽어가는 아이의 소원이니 소방차 출동할 때 한 번만 소방차에 아이를 태워줄 수 없냐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소방서장은 3일 후에 아이를 소방서로 보내라고 했단다. 약속한 날짜에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갔더니, 소방서장은 그 3일 동안 정성들여 제작한, 앙증맞게 작은 소방관 제복을 아이에게 입히고, 그날 하루 4건의 출동 시 소방차에 아이를 태워 동행시켰다고 한다. 그후 아이는 3개월을 더 살고 진짜 임종이 가까워졌다. 그러자 간호사가 아이의 임종 임박 사실을 소방서에 알렸고, 이에 근무자 이외의 나머지 소방대원들이 정복을 입고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그중 소방관 몇 명은 사다리차를 타고 병실 창문으로 접근해서 아이에게 거수경례를 올렸고, 소방서장은 병실로 방문해서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동료입니다”라고 말했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잠시 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임종했다고 한다. 우리 세상은 사랑이 필요하다. 좋은 일이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나를 포함해서 이 스토리를 접한 많은 사람은 대개 눈시울을 붉힌다. 아직도 우리 가슴엔 사랑하고 협력할 감정이 남아 있나보다. 심리학자 조슈아 그린은 개인과 집단 이익은 항상 충돌한다고 했다. 그린은 배가 폭풍 속을 항해할 때 배에 탄 두 사람은 같이 노를 저어야 폭풍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 경우는 두 사람 각자의 개인 이익과 두 사람의 집단 이익이 같아서 쉽게 협력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린은 폭풍우 속에서 두 사람이 탄 배가 가라앉는데, 구명조끼가 단 하나밖에 없다면, 두 사람 각자의 개인 이익과 두 사람의 집단 이익이 완전히 달라서, 두 사람 모두는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배려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사람은 상황마다 남과 협력할까 말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남을 배려해서 얻을 이익, 자신이 독차지해서 얻을 이익을 계산해서 협력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이 사례를 들으면, 하나밖에 없는 구명조끼를 차지하려고 악다구니를 벌이는 '계산 천국' 한국의 초경쟁 사회가 연상된다.

“비교하지 마라, 내가 세상의 기준이다”

한국민은 이렇게 희소한 물질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다가 남과 비교하고, 남과 비교하다가 또 경쟁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를 무한 반복한다. 비교 우위에 선 사람은 외제차를 몰고, 고급 아파트에 살며, 선민(選民) 지위를 누린다. 살맛이 달콤하게 날 것이다. 그러나 패자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경쟁하기도 싫고, 남에게 비교당하기도 싫은 사람은 혼족이나 자연인이 되어 아예 비교와 경쟁 상황을 피하거나 숨는다. 아니면 일탈(마약 중독, 알콜 중독, 자살 등)로 정상적인 삶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호주 정부는 16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X, 스냅챗 등 소셜 미디어를 이용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을 최근에 제정했다고 한다. 만약 소셜 미디어 플랫폼 사가 이들 소셜 미디어로부터 청소년 차단에 실패하면, 호주 정부가 플랫폼 사에 우리 돈으로 45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한다. 전 세계는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를 술, 담배, 도박 같은 청소년 유해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규제하자는 방향으로 행동을 몰아가고 있다. 이들은 다들 남과 비교하게 만드는 결정적 독소가 있는 디지털 기기들이다. 디지털 기기가 남과 비교하게 해서 청소년은 물론 성인을 '비교 기계'로 만들고, '비교 지옥'에 빠지게 하며, 그래서 우울증, 불안장애 등 정신 질환의 주범이라고 지적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알롱 드 보통의 <현대 사회 생존법>, 만프레드 슈피처의 <노모포비아 스마트폰이 없는 공포>,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 애나 렘키의 <도파민네이션>, 고용석의 <디지털, 잠시 멈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 등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시인 튜체프는 <침묵>이라는 시에서 "...마음이 어찌 말을 하겠는가?/남이 나를 어찌 이해하겠는가?/내가 왜 사는지 남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읊었다. 세상 사는 기준은 남에게 있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의 자신감을 가지면, 없으면 없는 대로, 뒤처지면 뒤처지는 대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어느 신문 칼럼에 실린 꽤 의미 있는, 그러나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글이 하나 눈에 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삶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라는 데, 그 내용은 이렇다. “지잡대 가거나 대학 안 가도 인생 안 망함. 돈 없이 결혼해도 인생 안 망함. 돈 없는데 애 낳아도 인생 안 망함. 나이 많은데 뭔가 시작해도 인생 안 망함. 대신 인터넷에서 남들 사는 거랑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 정신은 바로 망함.”

그렇다. 사람은 ‘본질’을 추구해야지 ‘트렌드(유행)’를 따라가면 안 된다.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인생의 본질은 자기 자신이 발굴한 나만의 ‘가치’다. 자신의 가치로 인생 본질을 삼는 사람은 질투하지 않고 시기(猜忌)하지 않는다. 유행과 트렌드는 '남의 시선'이다. 그걸 왜 우리가 의식하고 조바심을 내야 할까? 남과 비교하지 말자. 내가 곧 세상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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