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담배를 끊기 위해 <스탑 스모킹>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지인이 추천해 준 이 책에서 저자는 줄곧 ‘담배는 마약’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좀처럼 끊기 힘든 게 담배라고 했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자, 이제 책을 덮고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피웁니다. 그리고 담배를 끊습니다”라고 돼 있다. 신기하게도 책의 주문대로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피운 뒤 지금까지 금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후 가까운 후배 몇 명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금연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고, “담배를 끊을까봐 아예 책을 펴보지도 않았다”는 이도 있었다. 최근 이 책을 읽은 한 선배는 일주일간 금연 후 끝내 다시 담배를 입에 대고 말았다.
담배를 끊은 지 십 수년 됐지만 요즘도 가끔 다른 사람의 담배 연기가 코끝을 스치면 구수한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몸에 밴 것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담배에게서 배운다.
하물며 담배 하나 끊기도 이리 어려운데 사회 곳곳에 쌓인 폐단을 없애는 일은 얼마나 고단할까. 문재인 정부의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오랜 세월 익숙해진 것에서부터 멀어지는 작업이어서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개혁에 대한 거부 반응은 최근 몇몇 사례에서도 읽힌다. 문 대통령이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4기 추가 반입에 대한 보고 누락이 그렇다. 안보와 관련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상세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할 대통령이 뒤늦게 캐묻는 촌극도 벌어졌다.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안보실장의 질문에 국방부 장관은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딴청을 피웠다. 뉘앙스 차이라고 해명했다지만 국민들의 의구심을 지우기엔 역부족이다.
새 정부의 안보관이 못미더웠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사드 보복으로 온 나라가 난리인데 이런 정보를 까닭 없이 숨길 리 없지 않은가. 만에 하나 ‘안보는 군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었다면 사태는 심각하다. 사드에 관한 한 군 외에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컨스피러시(음모) 증후군에라도 빠졌단 말인가.
의료인류학자 데이비스-플로이드(Davis-Floyd)는 30년 전 미국 의과대학 학생들이 의료 기술적 모델을 어떻게 학습하고 받아들이는지 조사한 적이 있다. 그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인지퇴행(cognitive retrogression)이라는 특징적 과정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연구 결과 미국 의과대학 학생들은 수면 박탈과 엄청난 스트레스를 수반하는 통과 의례를 거치는 게 다반사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지퇴행이 수반된다는 경험 사례가 수집됐다. 방대한 의학 자료를 암기해야 하는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비판적 사고와 성찰적 학습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적 과부하로 인해 의학적 전문 지식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좁은 안목을 갖게 됐다는 게 요지다. 어느 한 분야에 매몰될 경우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이다. 군 수뇌부 또한 이런 경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안보는 군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민이 선출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최종 판단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군 수뇌부가 할 일은 어떤 게 진정한 국익인지 대통령이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사드 반입은 국익을 위해 한 일이고, 나머지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라는 발상이라면 지극히 위험하다. 정보를 사유화하려 들면 안보는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 어두운 창고에 숨겨둔 정보는 어느 날 비수가 되어 나라를 덮칠 수도 있다.
외교부도 마찬가지다. 한일간 위안부 합의 문서 내용을 공개하라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에 항소하면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공개하지 못 한다”고 버틴다. 국가의 이익이 언제부터 외교부의 전유물이었던가. 외교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정보의 비공개로 보호되는 국가의 이익은 국민의 알권리보다 크지 않다는 게 법원 판결이다. 그런데도 외교부는 아랑곳없다. “너희가 국익을 알아?”라는 말로 들린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취임 직후 국정원의 국내 정보 담당관제의 즉각적인 폐지를 선언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박수를 보낼 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눈치 볼 일도 사라졌다. 그동안 쥐고 있던 업무를 놓게 된 것을 아쉬워할 것도 없다. 과거에 머물면 불안하겠지만 변화에 몸을 실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국정원이 정치권의 관심 밖에 있는 순간 국정원 본연의 역할에 진력할 수 있다.
몸에 밴 것을 끊으려면 금단현상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관성은 변화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어쩌랴. 촛불에서 출발한 시대적 변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강력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을. 지난 대통령 선거가 정치권에 주문한 것은 숨김에서 드러냄으로, 단절에서 소통으로, 독점에서 공유로, 독선에서 포용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새 정부가 깃발을 든 협치조차 순탄치만은 않은 것 같다. 자유한국당은 벌써 여야정 협의와 원내대표 회동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와 여당은 포용과 설득에 매달려야 한다. 오죽하면 마키야벨리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했겠는가. 힘으로 누르는 혁명에 비하면 반대파를 안고 가야하는 개혁은 고난의 행군이다. 더구나 작금의 여소야대 국면은 더욱 그러하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이것 하나로만 국정의 동력을 삼기에는 무리다. 집요한 반대와 비협조, 쉼 없는 비난에 나가떨어지지 않을 장사는 없다. 진정성과 겸손, 그리고 포용만이 상대방의 경계를 늦출 수 있다.
자유한국당이야말로 땅에 떨어진 지지율을 조금이라도 되찾으려면 과거와 이별해야 한다. 야당의 명분을 지키기 위한 맹목적 반대나 독설을 경계하고, 외유내강을 벗으로 삼을 일이다. 국민과 더 멀어지면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지난달 23일 봉하마을에 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8기 추도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던 차였다. 문 대통령이 “임기 중 추도식 참석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할 때 문득 ‘결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는 너럭바위의 문구도 함께 스쳐갔다. 순간 너럭바위가 내게 물었다. ‘과연 너는 깨어있는 시민인가. 그렇다면 과거와 결별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