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하루 빨리 아이들을 데려올 속셈으로 형편이 될 때까지 또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었는데, 그해 연말에 아내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67년 당시 유산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유학생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출산 보험을 들지 못한 우리는 한 해 공부하는 비용만큼이나 출산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입이 다물어지질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동안 곰곰이 생각한 내가 아내에게 먼저 말을 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좀 나중으로 미루고 아이 출산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로 일을 하러 떠난 것은 1968년 5월 초였습니다. 그 당시 LA에는 한국 동포가 약 6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미국에 유학 와서 공부에 실패했거나 여러 이유로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로 모였습니다. LA에 도착하자마자, 잘 아는 예 형의 소개로 박준홍 목사를 찾아가 아파트를 새로 얻고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는 한국인 교회가 있는 윌샤워 가와 28번가 근처였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내가 찾고 있던 신문사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문사들이 몰려 있는 LA 중심부에 가까워야 했는데, 그곳까지 30분 이내 거리였고, 한국 식당이며 다른 한인 동포들이 그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아서 외롭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LA Times'와 'Herald Examiner'란 신문사에 우선 이력서를 넣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집사람 산월이 8월 중순이어서 출산 비용이며 생활비 걱정으로 초조한 마음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Herald Examiner를 찾아 갔더니, 마침 공무국의 노동조합이 파업 중이어서 공무국 안에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언론학 학사 학위를 가졌으니 편집국에서 기자일을 하고 싶었지만, 일을 가릴 사정이 아니어서 덥썩 공무국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파업하고 있는 노동조합원들이 문 밖에서 데모하고 있는 사이를 제치고 신문사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계면쩍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다급한 나로서는 얼굴이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파업 조합원들은 그렇게 들어가는 나를 "Scab"라고 부르며 욕을 했습니다. 그 말은 노동 파업자의 자리를 차고 들어갔다는 뜻인데, 나는 마치 귀가 막혔다는 듯이 모른 체하며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제발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내가 취직한 이 신문은 미국의 전설적인 신문 재벌 윌리엄 허스트가 차린 신문이었습니다. LA타임스보다 한동안은 부수도 많았던 권위 있는 신문이었는데, 1968년 파업으로부터 기울기 시작해서 끝내는 문을 닫아 버린 기구한 운명의 신문사였습니다.
일일이 노동에 의존하던 식자 조판 과정을 컴퓨터 조판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조합과 회사가 타협을 못 본 것이 결국 폐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해서 식자 조판을 하게 되니 그 컴퓨터 업무를 모르는 많은 노동조합원들이 전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이를 반대하는 파업 행사를 벌였는데, 그것이 그만 5년 이상 계속 되어 신문사와 노동조합 모두가 망해버리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나는 그런 파업 상황에서 처음에는 공무국 사무실에서 근무했는데 임금과 근무 시간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나는 학생 비자로 온 상태에서 학교를 일단 중지하였기에 미국 이민국에 실습 비자를 신청했더니 바로 안 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민국은 나에게 언론학을 전공했으니 편집국에서 일해야 된다는 것이며, 다시 학교에 등록하든지, 아니면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짜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공무국에 일하면 근무 시간을 내가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 학생 비자를 가진 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학원을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남가주 대학(USC: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을 찾아갔습니다. 가을 학기가 시작하려면 한 달쯤 남았는데, 나는 입학이 허락되었고 한 학기에 세 과목을 신청해서 다시 학생 신분을 찾았습니다.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된 나는 공무국 사무실을 떠나서 윤전실로 내려갔고, 윤전실에서는 주로 오후 4시에 들어가 새벽 4시, 때로는 아침 8시까지 12-16시간을 일할 수 있었으며, 매주 임금이 300달러 정도여서 비싼 남가주대학교 등록금을 내고도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 4시에 출근하여 아침 8시까지 신문사에 있다가 오전 9시 30분 강의를 듣기 위해 남가주 대학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다음 강의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엎어져 잠을 자고, 깨면 시험 공부를 하는 식으로 살다보니 침대에 편히 늘어지게 푹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어느 날 이틀씩 집에 들어가지 못해서 양말을 갈아 신지 못하는 바람에 냄새 나는 양말을 벗어 버리고 맨발로 구두를 신고 다녀야 했던 기막힌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산일이 가까워 오자, 당시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지인 민한기 씨 부부에게 응급 상황시 연락을 부탁해놓고 신문사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해 8월 17일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던 중, 아내의 진통이 시작되었고, 민 형의 폭스바겐 차로 그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할리우드 장로교 병원으로 직행, 그날 밤 아내는 사내 아이를 순산했습니다.
학사 공부를 했던 유진 시에서 애를 가졌다고 'Eugene'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마침 유진의 진은 집안의 돌림자인 '진(津)'자도 되어서 유진은 여러 가지로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모와 아기가 건강해서 산후 일주일 후부터는 내 도움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다시 신문사와 학교를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뱅뱅 돌았습니다. 그새 저축한 돈도 넉넉하여, 헌 차는 친구에게 주고, 미국에 온 뒤 네 번째 차를 샀습니다. 이 차는 1200달러를 주었는데, 전 주인이 거의 새 차처럼 아껴 타서 그런지 흠이 하나도 없는 65년 형 시보레 임팔라(Chevrolet Impala)였습니다.
1969년에 들어서면서 신문사 일을 좀 줄였고, 대학원 공부도 잘 진행되서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유진이를 데리고 한인 교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갔고, 틈틈이 샌디에고며 산타 바바라 근처의 명승지를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 부인의 소개로 유진이를 쌍둥이 엄마로 불리는 한국 부인에게 맡기고, 아내는 가죽 지갑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으며, 대구에 있는 두 아이들 걱정을 제외하고는 걱정 없는 생활을 처음으로 즐겼습니다.
건축 설계 사무소에 취직해서 신수가 핀 지인 방 형이 가족을 서울에서 데려 왔고, 오레곤대학에 다니면서 결혼식을 올린 심 형 내외도 공부를 마치고 이곳 LA로 내려와 오레곤대학교 출신 10여 가구가 서로 즐겁게 왕래하며 보냈습니다.
1965년에 존슨 대통령이 제정한 이민법의 혜택으로 미국에 오랫동안 거주한 우리 동포들이 처음으로 영주권을 받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으며, 나도 신문사 추천으로 영주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학원을 시작한 지 1년 반만에 논문을 제출하고 1970년 1월에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나는 학사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는데 석사 학위를 받을 때는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졸업식을 자랑스럽게 참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