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고학하는 유학생] 4년 반 만의 아이들과의 상봉, 그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박사 공부를 시작하다
석사 학위를 마치자, 그 당시 LA 타임스의 외신부장으로 있으면서 남가주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밥 깁슨(Bob Gibson)이 내게 박사 학위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내친김에 공부를 더해보자는 도전 심리와도 같은 심정으로 나는 박사 학위를 하기로 결심해서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언론학 박사 학위 과정을 개설한 대학은 미국에 10개뿐이었고, 그중 서부에는 스탠포드 대학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탠포드는 학비가 비싸고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 등 학교의 재정 보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서부에 있는 대학들을 알아보았더니, 아이오와대학에서 주 20시간 근무하는 조교 자리와 함께 박사 과정 입학허가서를 내주었습니다.
아이오와대학에서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8월 하순까지는 7개월이 남았고, 나는 이 기간 동안 공부할 필요도 없이 신문사 일만하면 그만이어서 모처럼의 팔자 좋은 신세가 됐습니다. 이때를 이용해서 나는 8월말 쯤 아이오와대학교가 있는 아이오와 시티로 한국에 있는 혜경이와 철준이를 데려오는 수속을 진행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속은 간편했으며, 한국의 가족에게 아이들 시카고까지 오는 비행기 값을 부쳤습니다.
LA의 신문사라는 좋은 직장에 근무하며 봉급도 많이 받는데 왜 또 박사 한다고 고생하러 아이오와에 가느냐고 가까운 친구들 모두가 말렸습니다. 다시 책과 씨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님께 박사가 되어 돌아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 정치학이나 자연과학의 박사 학위를 소지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언론학으로 박사 학위를 공부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1965년에 고려대학은 신문방송학과를 설립했으며 당시 그곳에 계신 오주환 선생이 언론학 박사 학위를 따가지고 모교인 고대로 오라고 유학 떠나기 전에 나를 격려한 말도 있고 해서,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아이오와 대학교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나는 LA의 윌쇼어와 28번가가 마주치는 지역에 있는 단독 주택 2층을 다 빌려서 쓰고 있었는데, 앞집에 서울에서 나 목사라는 분이 이민을 왔습니다. 그 분은 한국 신학교 출신으로 신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하신 김재준 목사의 제자였습니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온 나 목사 가족은 한 집안 같이 우리 가족과 아주 가까이 지냈는데, 두 분 목사님들이 공부 더 하러 가야 한다고 밀어 주셨습니다.
몇 번의 송별회를 마치고 자동차에 짐을 챙겨서 우리 가족 셋이 2000마일(3200km)의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이오와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고, 학교는 몇 달 뒤인 8월말쯤에 시작하게 되어 있었으며, 저축한 돈도 넉넉해서 우리 가족은 모처름 즐거운 마음으로 정든 LA를 떠나 첫날 라스 베이거스에 머물렀고, 그 이튿날은 그랜드 캐년에서 쉬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가 벌써 4년이나 지났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관광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아내는 이곳의 웅장한 자연 경치를 보면서 대구에 두고 온 두 아이들에게 이 경치를 못 보여 주는 것이 제일 아쉬웠습니다.
아이들 생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이 입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건만, 그리고 이제 그 아이들은 내 얼굴도, 이름도 기억 못하련만, 나는 어쩌면 그렇게 아이들이 그리운 것일까요? 참 신기했습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보다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지금 모습을 상상해내지도 못했지만, 아이들을 한순간도 보고 싶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는 “아버지”라는 말 한 마디가 내게 던져주는 총체적인 의무감과 사랑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미국의 서부 LA에서 중서부인 아이오와로 가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을 택해서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등을 거치면서 관광 명소를 모두 들러서 갔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오와에까지 도착하는 데에 1주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아이오와 주는 전체가 옥수수 밭 같았습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옥수수 밭 길을 달려 마침내 아이오와 시티에 도착하여 학교가 지정해준 아파트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상상과는 달리 마치 피난민 수용소 같았습니다.
그곳은 2차 세계대전 후에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온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양철로 조립한 반원형의 군막사(barrack)였습니다. 겉은 포로 수용소 같이 흉측했지만, 안에는 기름을 때는 난로가 있었고, 부엌과 침실 모두가 제법 쓸모있게 마련되어 있었으며, 집세가 아주 쌌습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짐을 풀면서 박사 학위를 2년 만에 마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거친 덕분에 직접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학부나 석사 전공이 다른 미국 학생들보다는 박사 학위 과정을 쉽게 마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계획대로 나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공부해서 학위 과정을 시작한 1970년 여름부터 1972년 3월 17일 논문 심사 통과까지 1년 7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손에 쥐었습니다. 물론 1, 2년 앞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 한국 유학생 김 형, 이 형 두 분보다 먼저 졸업했고, 30여 명의 서양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크게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1년 7개월 만의 박사 학위 취득은 아이오와 대학교 언론대학 창설 이후 신기록이며, 아직도 이 학교 학생들은 나의 최단기 박사 학위 취득 기록을 전설처럼 이야기한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완수하기에는 고생이 너무 심했습니다. 좁은 유학생 사회에서는 학생들이 모두 공부에 고생하고 있으므로, 서로 몇 학점을 신청했느니, A를 받았느니 하는 얘기는 집안 식구 끼리만 하는 것이지 동료 학생들끼리는 하지 않는 게 불문률이었습니다. 내가 15학점 이상 매학기 신청한 것이나(통상 정규 대학원생은 9학점을 수강함), 박사 과정을 모두 이수할 때까지 한 과목만 B를 받았을 뿐 전 과목에서 A를 받았다는 것도 졸업한 후에야 알려졌습니다.
박사 과정을 막 시작한 1970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0월초에 혜경이와 철준이가 시카고로 온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내가 이 두 아이들과 헤어진 지가 4년 반이 되었는데, 어느덧 혜경이가 7세, 철준이가 5세가 되었으니, 특히 작은 아이 철준이가 나를 본 기억이 없을 것임은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도착할 때까지 며칠 밤을 잠 한숨 자지 못 하고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데려 오려면 한 가지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누가 미국까지 데려 올 사람이 없는지라, 아이들의 이름표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크게 해서 달아 주고 한국 김포공항에서 미국 동부로 가는 사람들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겠다는 전갈을 한국으로부터 받은 것이 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한항공에 미주 노선이 없었고, 더구나 어린 아이들 단독 여행일 경우, 이들을 위탁해서 미국으로 보내는 family care 같은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러다 아이들을 행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지만, 나는 겉으로 아무 일 없을 것이니 걱정 말라며 태연한 척했습니다. 그러나 내 속마음이 숯검정이 될 정도로 타고 있음을 아내가 알리는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아이들은 무사히 미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동생이 한국 김포공항에서 아이들을 부탁하려고 무작정 붙잡은 사람이 한국인 의사 내외였는데, 그 의사 내외가 아이들을 샌프란시스코까지 데리고 와서 미국 입국 수속을 시켜 준 뒤에 다시 미국 국내선으로 갈아 태워 시카고로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인사를 수도 없이 했는데, 그들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하며 뉴욕으로 떠나갔습니다.
혜경이는 어려도 딸이라서 그랬나봅니다. 나를 보자마자 이내 "아빠!"라고 부르며 안기고 좋아 했습니다. 그 보드라운 뺨이며 조그마한 손등이 내 얼굴을 문지를 때 그간의 고생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저 행복만이 내 마음 속에 가득 차 올랐습니다. 혜경이의 도착은 나에게 아버지로서의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철준이는 달랐습니다. 그 애는 나를 심지어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서먹서먹해 했습니다(⑦-2 University of Iowa(아이오와 대학) 언론학 박사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