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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University of Missouri(미주리 대학) 언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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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University of Missouri(미주리 대학) 언론학 교수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7.2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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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세계 최초, 최고의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의 첫 외국인 교수가 되다
미주리 대학교는 의대가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의사를 양성하듯이 전문적인 언론인을 배출하기 위해 1908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언론대학(journalism school)을 창설했으며, 그후 1만 명이 넘는 졸업생들이 이 언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언론계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미주리 언론대학은 전 세계 언론학의 본산지입니다.
미주리대 저널리즘 스쿨 전경(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 대학에는 사회과학에서 독특한 철학에 근거한 연구방법 중 하나인 Q방법론을 창시한 윌리엄 스티븐슨(William Stephenson) 박사가 있었는데, 1973년에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제자로서 그를 이어서 Q방법론을 포함해서 사회과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매스컴 이론과 조사 방법론을 강의하던 도날드 브레너(Donald Brenner) 교수가 갑자기 텍사스 대학교로 떠나버려서 미주리 대학은 매스컴 이론과 조사 방법론을 강의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은 통상적인 구인 광고를 내지 않고 타 대학 언론학과 교수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사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티븐슨 박사와 가장 친한 맥그린 학장에게 구직 의뢰가 오게됐고, 나를 무척 좋아했던 맥그린 학장에게 그 부탁이 온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독특한 철학을 바탕으로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을 연구하는 Q방법론의 창시자 윌리엄 스티븐슨 박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미주리 대학교에서 찾는 사람은 컴퓨터에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언론학 박사를 하고 컴퓨터를 공부한 사람이 드문 때여서 맥그린 학장은 나에게 꼭 맞는 직장이 생겼다면서 나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미주리 대학 관계자와 여러 번 전화 통화를 한 후, 7월 말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미주리 주 컬럼비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채용 인사위원회와 하루 종일 만나 대화하고 토론했는데,그 당시 부학장이었던 밀트 그로스(Milt Gross) 교수가 “당신만 원하면 그 자리는 당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용 조건은 언론대학 학장인 로이 피셔(Roy Fisher) 교수와 구체적으로 논의하라고 했습니다.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미주리 대학에는 이미 한국인 교수가 3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화학과의 김헌용 교수, 물리과의 이금휘 교수, 정치학과의 조순승 교수였습니다. 특히 저널리즘과 유사한 학문 분야를 전공한 정치과 조순승 교수를 만나고 싶었지만 인터뷰하러 간 당시에 서울에 가 있다고 해서 그 때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종합적인 상황을 파악한 뒤 미주리 대학으로 가기로 최종 결정하고 아이오와로 돌아 왔습니다. 유학생 살림이라 별 것이 없었지만, 5명의 가족 짐을 다 싸고 보니 이삿짐이 제법 많아서 3톤짜리 트럭을 빌려 미주리 주의 컬럼비아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내 나이가 제법 든 편에 속했고, 신참 교수에서 테뉴어(종신직) 교수가 되기까지는 6년을 버텨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언론대학 유사 이래 7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 교수로 채용된 내가 이 학교에서 견뎌낼 수 있을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한국에 나가 있던 조순승 교수가 세를 내 놓은 집을 빌려서 일단 살기로 했습니다. 첫 학기 강의 과목으로 대학원 전공 과목 6개 중 2개를 고르라고 해서, 나는 그 중에서 연구 조사 방법론과 매스컴 이론 두 강좌를 맡았고, 즉시 강의 준비에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강의를 하게 된 상황에서 내게 문제가 된 것은 강의 내용이 아니고 강의 전달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바로 마치고 온 처지이니 신참 대학원생들을 놀라게 할 만큼 많은 책을 읽었고 매스컴 이론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영어로 전달한다는 것은 특별한 별도의 기술이었습니다. 나는 사전에 강의 연습을 했고 이를 녹음해서 다시 들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학생들이 내 강의를 알아 듣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때부터 연극 대사를 외우듯 강의 내용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강의 시간에는 마치 내가 한 편의 연극을 연출하듯 정성을 들여 매시간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가끔 미국에서 강의하는 교수 제자들을 만나면 나는 연극 대사를 외우듯 강의를 녹음하라고 이릅니다. 교수가 강의를 잘 하기 위해서는 연극 대사를 외우듯 녹음해가면서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스티븐슨 박사의 특별한 배려와 맥그린 학장의 같은 제자였던 키스 샌더스(Keith Sanders) 교수가 첫 해 적응하는데 전념을 다해 도와 주어서 나는 강의에 자신을 얻기 시작했으며 학생들 반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미주리대학 언론대학 동료 교수로서 초창기 나의 이 대학 정착을 도워주었던 키스 샌더스 교수(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세상에서 제일 바쁘다는 조교수의 첫 학기에 나는 우리 대학의 교수 볼링 팀과 골프 팀 멤버가 되어서 월요일 저녁에는 매주 볼링을 해야 했고 화요일 오후에는 학과별 교수 골프 리그에 출전해야 했습니다. 강의 준비에 바쁜 처지였지만, 내가 다른 교수와의 사교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이런 스포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주리 대학 언론대학에는 교수들 10여 명으로 구성된 포커 클럽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교수 사회의 사조직으로 2주에 한 번씩 모여 포커 게임을 했는데, 베팅 금액은 5 ~ 25센트 정도로, 게임은 돈보다는 사교의 목적이 더 중요했습니다. 포커 클럽 회원 10명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집에서 포커 게임을 주최해야 했고, 또 주최자는 음식과 맥주 등 음료수를 준비해야했습니다. 샌더스 교수의 권유로 이 포커 클럽까지 참가하고 보니, 세상 가는 줄 모르게 바쁜 나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힘든 강의를 하는 와중에도 골프와 포커를 즐기는 낭만도 이 시기에 같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주리 대학에 온 시기와 같이해서 후에 새천넌민주당 당 대표를 지낸  정대철 의원이 정치학과 박사 과정 학생으로 이곳 미주리 컬롬비아에 왔습니다. 그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곧 가까워져서 서로 형제처럼 왕래했고 서로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이해하고 지냈습니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은 아이들이 점점 자라는 데도 봉급이 얼마 안 되었고, 아이오와 대학 시절에 빌려 쓴 돈도 갚아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아내가 일을 다시 찾아야할 상황에서, 정대철 의원의 부인도 아들 호준이가 아직 어렸지만 일할 기회를 생각하고 있어서, 두 가족이 연구해 낸 것이 세탁소를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동네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는 미국인 레이(Ray)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정대철, 레이, 나 이렇게 셋이서 3분의 1씩 지분을 투자해서 1만 달러를 주고 세탁소를 샀습니다. 한 사람이 1000달러씩 3000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했고, 나머지 7000달러는 은행에서 빌렸습니다. 몇 군데 모텔의 수건이나 침대보와 동네 중학교와 고등학교 운동 선수 유니폼 세탁을 주문 받아 처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회용 기저귀를 거의 사용하지 않을 때여서, 아기용 천 기저귀를 대여하고 세탁 후 다시 대여해주는 서비스가 수입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농구 유니폼을 빠는 과정에서 유니폼 속에 들어 있던 볼펜이 같이 세탁되는 바람에 유니폼을 버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 일로 유니폼을 배상해주게 되면서 더 이상 학교 운동 선수 유니폼 세탁일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집 부인들은 세탁만 하고, 나와 정대철은 학교 일이 바빠서 별로 세탁소 일을 돌보지 못하게 되자 모텔 빨래감을 걷어오는 일 등이 모두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세탁소 사업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정대철과 나는 교대로 틈 날 때마다 기저귀 배달을 해야 했는데 바쁘다 보니 이 일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세탁소를 경영해서 집도 사고 부자가 되어 보려는 꿈은 점차 사라지고 하루 속히 팔아버리려는 마음에 개업 반년 만에 세탁소를 내 놓았습니다. 세탁소를 내놓은 지 한 달도 못 되어서 우리가 주고 산 값으로 새탁소를 다시 팔아버렸는데, 두 집 모두 이 일을 아주 시원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작은 사업이라도 미국에서 성공하기는 무척 힘들다는 경험을 한 셈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나의 노력과 실력을 점차 인정 받게 되면서, 나는 이 학교에서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 즈음에 집을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세탁업을 동업했던 레이가 나를 위해 열심히 내 집을 알아본 끝에 1973년 봄에 집을 사게 됐습니다. 3만 9000달러짜리 집이었는데, 저축한 돈이 거의 없어서, 피셔 학장이 현금 1000달러를 구해 주었고, 이곳 지방 은행에서 단기 3년 융자로 4000달러를 꾸어 주어서 총 5000달러에 집을 인수했는데 , 나머지 모자란 돈은 은행에 25년 동안 연이자 6.5%로 물어나가는 모기지였습니다. '하이릿지 드라이브(Highridge Drive) 1817 번지'의 주소를 가진 이 집은 대지 6000평에 90평 정도의 크기로 2층과 큰 지하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하층 문을 열고 집 뒷뜰로 나가면, 넓은 베란다가 있고, 그 앞에는 수목이 우거진 숲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국 학생 100명 이상이 그 숲 속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했고, 지하방에는 노래방 기기를 차려놓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이국 생활의 향수를 달랜 추억이 가득한 집이었습니다.
구글 항공 사진으로 본 미주리 하이릿지의 집(왼쪽)의 모습. 아직도 외형은 10여 년 전 우리 가족이 떠나온 때 모습 거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사진: 구글 항공 사진)
2004년 은퇴 후 캘리포니아 라구나 우즈 지역으로 이사 오면서, 이 집을 미주리 대학에 기증하여 한인 유학생을 위한 '메모리얼 하우스(Memorial House: 기념의 집)'로 만들자는 제안을 미주리를 거쳐간 많은 한국 제자들과 언론인들이 했으나, 캘리포니아 주 라구나 우즈 지역의 집값이 컬럼비아보다 비싸서 할 수 없이 컬럼비아 집을 팔게 되었습니다. 당시 하이릿지 집을 판 아쉬운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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