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1 University of Iowa(아이오와 대학) 언론학 박사에서 계속) 아내가 “철준아, 아빠 몰라? 아빠 해봐, 응? 엄마가 사진도 많이 보여 줬잖아. 아빠야, 아빠” 해도 철준이는 아내의 뒤로 몸을 비비 틀며 돌아가서는 도대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이 아이와 친해지는 온갖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것 중 한 가지는 장난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사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며 맛난 음식에, 좋은 옷, 장난감들을 돈 아끼지 않고 사 주었습니다. 보상 심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갚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날마다 아이들에게 돈을 쓰다 보니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돈이 바닥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래도 마냥 신이 난 푼수처럼 아이들만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좋아했습니다.
혜경이는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갔고 철준이는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영어를 하나도 못하면서도 학교를 좋아했으며, 학교의 서양 친구들이 우리 아이들을 서로 도와 주겠다며 나섰습니다. 서울에서 구구단 셈법까지 배우고 온 혜경이는 학교에서 수학은 물론 영어도 빨리 배우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아내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했습니다. 세 아이를 돌 보자니 절대적으로 드는 돈이 많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칫솔을 만드는 동네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공장일은 오후 4시부터 밤12시까지 해야했고, 그래서 낮에는 아내가 아이들을 보고, 오후 4시쯤부터는 내가 집에 가서 아이들을 맡아 보는 방식으로 생활했습니다.
그 당시 해병대 소령으로 제대하고 이민 온 교포 임 형이 그 동네에 살았는데, 아내는 임 형 부인과 같이 일하게 되어 출퇴근도 같이하고 서로 돌봐주어서, 아내의 칫솔 공장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잘 견디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해 봄에 학교는 마침내 수용소 같은 군대 막사형 아파트를 헐어 버리고 새로 현대식 학생 아파트를 신축했습니다. 우리는 곧 그곳으로 이사했는데, 침실이 두 개인 이 아파트는 약 30평쯤 되었고, 가구도 새 것들이었는데, 집세를 더 많이 내야 하는 것이 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 대학에는 한국인 교수가 4명 있었는데, 공과대학의 임관 교수는 나중에 서울에서 과학원 원장까지 하셨고, 정모 교수, 정치학과에 김종림 교수, 그리고 사회학과에 또 한 분이 계셨습니다. 유학생 가족은 40여 가구나 되었으나, 오레곤 때와는 달리 대부분이 결혼한 학생 부부들이었고, 서울에서 송금도 가능하게되어 일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자, 온 가족이 처음으로 캐나다 동서 집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자동차로 1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중간에 휘발유를 넣고 햄버거 사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달렸으며, 무엇보다도 아이들 셋을 데리고 하는 여행은 즐겁기 한이 없었습니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아이들은 사촌들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나와 동서도 일주일을 꿈같이 보내고 헤어져서 다시 아이오와로 돌아 왔습니다.
세 번째 학기인 여름학기가 끝나나고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3주간의 방학이 있는데, 나는 박사 학위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하여 LA에 다시 다녀 오기로 했습니다. 미국에서 4년여를 살면서 한 번도 버스를 타고 여행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나는 일부러 LA까지 버스를 타고 갔 습니다. 왕복 그레이하운드 버스 요금이 90달러였으며, 비용도 싸고 중간 중간의 도시를 들러 가니 나름대로 재미있는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56시간을 버스를 타게되니 지루하고 고통스러워, LA에 도착해서 1주일 동안 자료 수집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통상 9학점 세 과목이 대학원생이 수강하는 학점이었는데, 매 학기마다 평균 15학점씩 마치 학부 학생처럼 과목을 많이 신청하고 보니, 4학기에 박사 과정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이수할 수 있었으며, 특히 언론학과는 거리가 먼 컴퓨터 과목과 사용법을 부전공으로 수강하여 새로운 테크놀로지을 익혔습니다.
IBM의 'Display Write(MS WORD 같은 미국의 문서작성용 프로그램)'의 초창기 프로그램으로 1970년에 처음 나온 ATS가 아이오와 대학에 들어왔는데, 나는 언론대학에 건의해서 ATS라는 당시 신기한 문서작성용 프로그램을 구입하게 했고, 아이오아의 언론대학에서 타자기가 아니라 컴퓨터 문서작성 프로그램으로 박사 논문을 쓴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습니다.
1971년 11월에는 과목을 거의 끝마쳐서 종합시험을 볼 무렵이었습니다. 매일 아내가 집에 있는 시간에는 사무실로 갔고, 아내가 일을 나갔을 때는 아직 세 살밖에 안된 유진이를 돌보는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혜경이와 철준이는 학교에 간 상태이고, 아내가 일하러 간 사이에, 나는 유진이를 집에서 보다가 학교에 급한 일이 생겨서 유진이에게 TV를 틀어주고 잠깐 혼자 앉아 있으라고 일러두고 학교에 갔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앉혀 놓으면 몇 시간씩 별 문제 없었습니다.
나는 학교 일이 복잡해져 바로 집으로 오지 못했고, 유진이는 한 시간쯤 지날 무렵 TV에서 무서운 장면이 나왔는지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어버렸는가 봅니다. 평소에도 그리 가깝지 않았던 아랍 계통의 학생이 맞은 편에 살았는데, 이들이 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해 버렸습니다.
12세 미만의 아이를 혼자 두는 것은 미국 법을 어긴 것이었으며, 경찰이 주정부에 연락하여 어린이 보호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집에서 유진이를 돌보게 됐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나는 이 상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잘못했다고 사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한다는 서류에 서명한 후에야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겨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유진이를 절대로 혼자 남겨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잠깐만이라도 혼자 어디 갈 일이 생기면, 옆에 사는 동료 학생에게 유진이를 맡겼습니다.
아내가 밤늦게까지 직장에 있을 때는 유진이 때문에 집에 있어도 문을 닫고 종합 시험과 논문 준비를 했으며, 다른 가족들은 주말이면 모두 놀러 가는데, 나는 아이들을 피해 아예 사무실로 도망가서 논문 준비를 했으니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네 번째 학기에 종합 시험을 통과했고, 1971년 겨울 크리스마스 때부터 1972년 봄까지 3개월 동안은 오로지 논문만을 생각하고 사무실에 하루 평균 16시간씩 박혀 있어서 가족들도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마지막 논문 심사를 마친 날이 1972년 3월 17일이었습니다.
박사가 된 이날 3월 17일은 공교롭게도 나의 음력 생일이어서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동료 학생 결혼 축하 파티에 갔다가 박사가 된 흥분에 젖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샸?? 가톨릭 신부 출신 박사 학생인 짐 머피와 그의 아내 샤론에게 업혀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후에 샤론은 다른 대학의 학장을 지냈으며 그녀의 남편 짐은 암으로 작고했습니다. 새론은 만날 때마다 그때 술이 취한 나를 업어서 데려다 주었다는 말을 하면서 지금도 놀리곤 합니다.
아이오와의 3월은 아직도 춥습니다. 눈이 겨울 내내 쌓인 채 녹지를 않습니다. 몇 개월을 논문에만 매달려 있다가 막상 박사가 되고 보니, 갑자기 할일이 없어진 듯했으나, 나는 다시 취직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서울의 고려대에는 김상협 총장이 계실 때였고 이세기 형이 총장 비서실장을 하고 있을 때여서 우선 고대에 갔으면 좋겠다고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려대는 우석대학과 합치는 일이 있어서 나를 반갑게 들아오라고 하기 힘든 상황인 듯했습니다.
고대로 갈 생각이 강했다면, 서울의 다른 대학이라도 알아보고 한국으로 나갔을 텐데, 아이들도 이제 영어를 제법 잘했고, 우리 내외도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다만 1년이라도 미국에서 취직해서 경험도 얻고 또 즐기다 가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 있었습니다.
3월부터는 취직 관계로 낮에는 이곳저곳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고 여러 대학에 전화로 자리를 알아보는 게 할 일의 전부였으며, 저녁에는 서양 학생들로부터 포커 게임을 배웠습니다. 동전내기여서 돈의 액수는 얼마 안 되었지만, 포커를 열심히 즐겼고, 눈이 녹기 시작하자 녹슨 골프 채를 꺼내어 매일 골프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어서 취직이 되기 만을 기다렸는데, 나한테 맞는 직장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로 오퍼가 오는 자리는 아주 작은 대학에서 언론학에 관한 모든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만능 교수 자리였으며, 특히 박사 과정이 있는 명문 대학에는 이력서조차 내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개 대학에서 관심이 있는 듯했지만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 보고는 다시 소식이 끊어지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다섯 식구의 가장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5월 15일에 졸업식을 하고 나면, 이제는 조교 월급도 받을 수 없고, 학교 아파트도 비워야 하는데, 박사 학위를 받아 놓았으니 나는 어디 가서 막노동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 어려운 사정을 잘 아는 아내는 칫솔 공장에서 임금이 조금 좋은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으로 옮겨서 일했습니다. 임금이 좋은 대신 일이 상당히 힘든 것이어서, 나로서는 아내 노동이 안타까웠지만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바가지나 좀 긁어주면 내 속이 차라리 편하련만, 고생한다는 소리 한 마디도 안하고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 당시 언론대학 학장이며 커뮤니케이션 교과서에 그가 만든 모델도 나오는 맥그린(MacLean) 박사가 학위 과정에서 여러 모로 나를 돌보아 주는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나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여러 군데 자리를 알아본 덕분으로, 두 군데에서 내가 갈 수 있는 자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 하나는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로키 산맥 주변 주들이 참여해 인공 위성을 이용한 교육방송 프로를 제작, 방송하는 연방 기구였습니다. 그곳에서 이 교육방송의 효과적인 계획과 평가를 위한 수석연구원을 찾고 있었는데 맥그린 박사가 나를 그 자리에 추천해 주었습니다.
영주권도 갖고 있고 나의 학력과 경력이 모두 자기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서도 역시 연방정부에서 관할하는 기구이고 보니 채용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또 책임자로서는 9월 1일부터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미주리 대학교였습니다. 내가 미주리 대학교 교수로 이곳에 부임하고 난 후인 8월 24일 콜로라도에서도 오라고 전보가 왔지만, 나는 이미 미주리에 발을 디뎠고, 연방 정부 연구원 일은 그렇게 꿈 같이 날라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