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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 안식년 맞아 10년 만의 귀국, 한국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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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 안식년 맞아 10년 만의 귀국, 한국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8.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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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한국 유학생의 대부로 이들의 성장을 돕다 / 장원호

(9)-1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사람이 그립다거나 한국말을 하고 싶다는 느낌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한국 학생들과의 교류를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유학을 와서 거의 같은 시절에 학위를 마치고 미국의 다른 작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에서 교수 생활하기가 지긋지긋하다고 항상 불평했고, 기회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당장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매일 학교에서 미국 사람들과 생활해야 했고, 또 영어만 쓰다 보니 항상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꼈으며, 어쩌다 다른 미국 교수들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봐 늘 긴장되고 피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처지에 비하면, 내 연구실 주변에 항상 한국 학생들과 한국 언론인들이 있는 상황은 정말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한국 학생들을 보며 늘 기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학비 보조를 어떻게 해서든 많이 해 주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을 찾는 것이 나에겐 큰 일거리였고 고민거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주거나 조교 자리를 찾아 주려고 애를 썼는데, 조교 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고, 학교의 방침으로 두 명의 교수에 한 명의 연구 조교가 배당되었던 게 당시 실정이었습니다. 

내가 미주리 대학에 올 때에 이 대학에 처음 도입된 컴퓨터 시스템을 더 발전시키고 한편으로는 내심 한국 학생들에게 더 많은 조교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욕심으로, 나는 학교에 건의해서 '저널리즘 컴퓨터 센터'를 1983년에 설립했습니다.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의 월터 윌리암스 홀의 뒷면. 저널리즘 컴퓨터 센터는 이 건물 2층 왼쪽 방에 자리잡고 있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83년는 아직 문서작성을 할 수 있는 PC가 개개인 학생들에게 보급되기 전이어서, 이 센터는 분서작성 용 PC 7대를 차려놓고, 학생들이 논문이나 리포트를 타자기 대신 컴퓨터로 작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이 센터는 학교의 중앙 전산처리 시스템과 연결하여 교수나 학생들이 연구 활동을 할 때 필수적인 통계분석을 통계 프로그램인 SPSS, SAS 등을 사용해서 처리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센터는 밤 늦게까지 문을 열어야 했고, 그러자니 조교가 여러 명 필요했습니다. 

1970년대 사람들은 IBM-PC로는 주로 displaywriter라는 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사용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나는 그 센터의 소장이 되면서 조교들을 모두 통계에 능한 한국 학생들로 임명했는데, 그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그 중 이른바 '3김 시대' 이야기는 꽤나 오랫동안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에서 회자되었던 유명한 얘기였습니다.

현재의 성균관대의 김정탁 교수, 외국어대의 김흥규 교수(작고), 그리고 고려대의 김승현 교수 등 세 명이 박사 과정에 있을 때 이 저널리즘 컴퓨터 센터에 같이 근무했는데, 이들을 구분 못하는 미국 교수들이 이들에게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김정탁 교수는 항상 웃는 얼굴이라고 해서  'Smiling Kim'이라 불렀고, 김흥규 교수는 석사 논문을 범죄 뉴스를 분석해서 썼다고 해서 'Crime Kim'이라고 불렀으며, 신입생인 김승현 교수는 'Another Kim'으로 명명되어 불렸습니다. 후에 이들이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었을 때, 미국 교수들이 이들의 별명을 대며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그 다음은 “3정 시대”가 있었는데, 현재의 경북대의 정걸진, 숙명여대의 정만수, 경성대의 정태철 교수 등 세 명이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 당시 한국 사람들은 이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또한  단국대에 있다 은퇴한 윤석홍 교수도 박사 과정 때 이 컴퓨터 센터의 조교를 지냈습니다.

이 센터는 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들이나 연구 논문을 쓰는 교수들에게 데이터 분석 등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 후 PC가 가정용으로 대량 보급되어 이 센터의 문서작성 기능은 별로 필요가 없어졌고, 나중에는 교수나 대학원생들의 통계 처리를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센터로 규모를 줄여 운영하게 됐습니다. 나는 1987년 풀브라이트 재단이 지원하는 교환교수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6개월 간 체류한 기간에도 이 센터의 소장을 맡았는데, 미국으로 돌아와서 이 센터 운영을 대학원 담당 부학장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풀브라이트 재단은 미국의 정치가 겸 교육자인 풀브라이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각종 장학 사업을 벌여 전 세계 학자와 학생들이 연구하고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1987년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이 센터에서 몇 가지 일어 벌어졌습니다. 이 센터에 근무하던 한국 조교들이 바둑 판을 갖다 놓고 바둑을 두었으며, 센터 안에서 담배를 피워 센터 안이 온통 연기로 가득 차는 '불결한 환경'을 만들기도 했고, 미국 학생들이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도움을 청하면, 한국 조교들이 한국말로 자기들끼리 킥킥거리고 불친절하게 대한다는 불평이 학교 당국에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이 센터의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미국인들로서는 우리끼리 하는 한국말이 행여 자신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때가 종종 있었고, 컴퓨터 센터에서 한국 학생들끼리 한국말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미국 학생들에게 그리 들렸던 모양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젊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직업입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여름 방학 3개월, 겨울방학 1개월, 그리고 추수감사절, 부활절 휴가 등 학교에 출근 안 해도 되는 기간이 1년에 5개월 가까이 되고, 특히 6년 동안 근무하면 1년 동안은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소위 안식년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마다 제도가 조금씩 다르지만, 미주리 대학에는 세 종류의 안식년 제도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연구 휴가'가 있는데, 이는 교수가 연구 계획을 대학 당국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은 후 휴가를 받는 것을 말하며, 둘째로는 젊은 조교수들에게 해당되는 ‘계발 휴가’가 있습니다. 이 ‘계발 휴가’는 다른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가서 교수로서의 자질을 향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안식년 휴가가 있습니다. 이 휴가는 원칙적으로 6개월 동안 모든 월급을 다 받고 다른 대학에 가서 연구나 강의를 하거나, 또는 본 대학에 머물면서 강의를 하지 않고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나는 1977년에 부교수로 승진된 후 1979년 가을에 안식년 휴가를 가기로 결정하고 서울의 고려대에서 강의할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셋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기 전이어서 가족 모두가 함께 서울에 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집사람도 이곳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처지여서 나는 6개월 동안만 혼자 서울에 나가 있기로 했습니다.

1979년에는 고대에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는 제도가 정립되지 못했고 또 외국인 교수를 위한 주택 시설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숙소로 잠실에 사는 여동생 아파트의 방 하나를 빌렸으며, 충북 음성에 사는 막내동생이 ‘포니’ 차를 내주어서 서울에서 자동차로 강의하러 이화여대, 외대, 경희대, 고대 등을 별 불편 없이 돌아 다닐 수 있었습니다.

간단한 서류 절차를 거친 후에 고려대는 나에게 정교수 11호봉의 좋은 대우로 객원교수 발령을 해주었습니다.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에서도 집중 강의로 한 강좌를 맡아 달라고 객원교수 발령을 내주었습니다. 서울에서 체류하는 6개월 동안, 나는 강의를 위해 일본을 수시로 왕래했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상지대학이 가지고 있는 ‘이찌가야’ 지역의 고급 아파트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받았습니다.

고려대에서는 학부 과목으로 ‘광고원론’을, 대학원 과목으로는 ‘연구조사 방법론’을 맡았고, 경희대에서도 대학원 과목을 맡아 달라고 하여 대학원생 3명이 고대로 와서 고대 대학원생들과 함께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화여대에서도 의뢰가 와서 대학원 과정의 ‘커뮤니케이션이론’을 강의했고, 또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학부 이론 강의를 맡았습니다. 나의 6개월 한국 생활은 일본으로 왔다 갔다 하는 등 정신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외국어대학에서는 김정기 교수와 함께 ‘노동신문에 나타난 소련의 이미지’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서 그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대학 앞쪽에 있는 음식점들을 즐겨 다녔습니다.

고대의 학부 과목인 ‘광고원론’은 수강 학생 수가 무려 120여 명이었는데, 학생들의 데모가 치열한 시기여서 계획된 강의를 다 못하고 한 학기를 마치게 되어 지금도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당시 고대 신방과에는 임동환, 한진만(현 강원대 교수), 그리고 김춘희 등 세 명의 대학원생 조교가 있었으며, 임동환 군이 주로 내 과목인 ‘광고원론’ 조교 일을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들 세 명의 대학원생들과 함께 무교동 낚지집과 당시 내가 머물고 있던 잠실 근처의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김춘희 군이 결혼한 후 대방동 셋집 집들이 겸 나와 다른 조교 두 명을 초청했는데, 우리는 그들 내외가 준비한 온갖 음식을 즐긴 후에 다시 잠실까지 갔다가 결국 우리 셋 모두가 경희대의 이광재 교수 아파트로 가서 밤을 새우며 즐거운 기간을 보낸 추억이 새롭습니다.

큰 강당에서 100여 명이 넘는 학부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잘 하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특히 나는 미국에서 생활한 지가 15년째였고, 더구나 모든 공부를 영어로 했기 때문에 학술 용어를 바로바로 한국어로 번역할 수 없을 뿐더러 지난 8년 동안 계속 영어로만 강의를 해왔으니 한국어 강의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에는 '포럼'이란 이름을 가진 강의실이 있다. 사진은 포럼 강의실에서 열린 한 세미나 모습(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미국에서 처음 조교수 생활을 시작하던 시절에 강의록을 작성해서 소리내서 연습했던 것처럼 한국어 강의를 준비해보았으나, 한국어 단어와 단어가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아, 아”를 중간중간에 쉴새 없이 끼워 놓고 있으니, 듣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를 잘 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지만, 좋은 강의는 강의 내용도 좋아야 하지만, 전달하는 데에도 일종의 연출하는 기술을 갖추어야 합니다. (9)-3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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