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 장원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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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에 아주대학교 학보사 미국 해외 취재 여행을 떠났습니다. 총장이 강력히 밀어 주어, 우리는 두둑한 여비를 가지고 알찬 계획을 세운 다음 미국으로 출발했습니다. 당시 편집장인 권 군, 전 편집장 박 군, 기자 정 군, 윤 군 등 4명의 남학생과 기자인 박 양, 이 양, 김 양 등 3 명의 여학생, 그리고 나까지 8명이 미국을 간 것입니다. 7명의 학생은 미주리 대학에서 3일 간 언론에 관한 교육을 받고 미주리 대학을 취재한 뒤, 다시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박 군을 단장으로 플로리다 대학을 취재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주대는 이 해에 처음으로 입학 성적이 우수한 신입생 중 일부를 선발해서 플로리다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박 군 팀은 이곳 프로리다 대학을 가서 이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취재한 뒤 서울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고, 또 다른 팀은 네 명의 학생과 내가 서부 쪽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와 스탠포드 대학을 취재하고 서울로 오는 계획이었습니다. 아주대 해외 취재 팀이 미주리 대학에 도착했을 때, 마침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KBS 출신인 김헌식 기자가 박사 논문을 마치고 마지막 구술시험을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대 학생 기자들은 도착한 이튿날 미주리 언론대학 소강당에서 내가 위원장으로 진행하는 미국 박사논문 구술시험 현장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김 군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으므로 나의 이번 미국 여행 스케줄에 맞춰 박사 논문 최종 심사를 받도록 사전에 대학과 일정을 조절했던 것입니다. 언론대학에서 4명의 교수와 타 학문 분야에서 1명의 교수 등 총 5명이 심사위원이 되어 논문을 리뷰한 다음 진행되는 마지막 논문 심사는 논문을 방어하는 'defense' 또는 'oral defence'라고도 하고, 이 심사에 통과되어 박사가 되면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는 뜻으로 'final exam'이라고도 합니다. 소강당 회의실에서 열린 이날 논문심사는 위원장인 나의 개회에 이어 김 군이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논문 개요 발표가 있었습니다. 김 군은 현직 방송기자이며, 영어에 능통하여 미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었고, 이라크 전쟁 중에는 KBS 특파원으로 활약한 경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 군의 훌륭한 영어 발표에 아주대 학생기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이어 두 시간에 걸친 교수들의 날카롭고 무서운 질문과 김 군의 능란한 답변이 진행되는 도중, 학생들은 손에 땀이 났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질문과 답변이 진행된 후, 위원장인 내가 방청객과 피 심사자인 김 군을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 심사 결정을 위한 비밀회의를 선언했습니다.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는 김 군과 김 군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될지를 모르는 학생들이 논문 통과 여부에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10분, 20분이 지나도 심사실 문이 안 열렸습니다. 모두들 초조감은 점점 커지기만 했을 때, 드디어 문이 열리고 위원장인 내가 앞에 서고 다른 네 명의 교수가 그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Dr. Kim, congratulations. You have successfully defended your dissertation"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마치 내가 박사가 된 것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이어서 다른 교수들이 축하 악수를 하면서 하는 말이 "Welcome on board!"입니다. 이 뜻은 원래는 같은 배를 탄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모두 박사인 심사위원들과 같은 박사 반열이 오른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일부 교수들은 김 군을 포옹하고 등을 두드려 격려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학생들은 자기들이 박사가 된 것처럼 감명을 깊게 받았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난 후 여학생 한 명이 왜 심사 후 비밀회의가 그렇게 오래 걸렸냐고 물었습니다. 그 속에서 심사위원들이 주고받은 대화가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었습니다. 혹시 논문에 반대하는 교수가 있어서 길어졌는지 등을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사실 심사위원들은 발표 직후 박사학위 통과를 만장일치로 바로 합의했고, 그 뒤로는 심사위원들이 모처럼 만났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잡담을 한참 했지“라고 말하자, 그 여학생은 "세상에 학생은 결과를 기다리느라 애가 타서 죽겠는데 무슨 잡담이었냐"고 한심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들 심사 교수들도 과거에 박사학위 심사를 받을 때 다 그런 경험을 겪었으며, 그건 일종의 전통이라고 내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통과되었으니 Dr. Kim이라고 불렀지, 통과 안 되었으면 Mr. Kim 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지. 그러면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은 사람들도 많지” 하고 내가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31명 박사학생을 지도하고 박사학위를 받게 한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Dr. 누구"라고 하는 순간 기절한 학생을 떠올렸습니다. 참 많은 우여곡절들이 내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동안 일어났습니다. 논문이 끝난 김헌식 박사는 미주리에 있는 동안 아주대 학생들의 모든 편의를 돌봐주며 그들의 교육과 취재를 도와주었고, 그후 김헌식 박사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KBS에 복귀했다가 지금은 퇴직하고 명문 콜로라도 대학의 언론학과 교수가 됐습니다. 김헌식 박사는 우리가 귀국한 후 수원에 와서 KBS 기자로서 아주대 학생들에게 몇 번 특강도 했고, 학보사 기자 학생들과 같이 소주도 마시는 등 우리 학생들의 좋은 선배가 되어 주었습니다. 다른 곳의 취재를 맡은 박 군 팀 일행은 차가 없어서 고생을 한 반면, 나와 함께 떠난 네 명의 학생들은 좋은 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선 비행장에 내리자 마자 예약한 렌터카로 공항 근처의 모텔로 옮겨 짐을 풀고 3박 4일을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보냈습니다. 하루는 버클리 대학 캠퍼스와 다른 샌프란시스코 명소를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금문교를 밑에서도 보았고, 나중에는 차로 다리 위를 지나서 쏠사리트도 구경했으며, 악명 높은 ‘산 퀸틴’ 감옥이 있는 섬에 내려서 감옥 안도 구경했습니다.돌아오는 길에 학생들은 모두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식당이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하려고 차를 빨리 몰았습니다. 학생들의 미국 서부 여행은 알차고 즐거웠고, 우리는 서울로 가는 13시간 동안 유나이티드 항공기 3등칸에 앉아서 지난 며칠의 즐거웠던 미국 여행 기억으로 얘기의 꽃을 피우며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학생들에게 귀중하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준 것 같아서 속으로 많이 뿌듯했습니다. (17)-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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