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 나도 면장 아들 친구처럼 3대 독자라고 해서 귀여움을 받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사내아이는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해서 수영도 배웠고, 겨울에는 큰 저수지로 가서 집에서 만든 스케이트로 얼음판을 누볐습니다. 추운 겨울에 저수지 물에 빠지기도 했고, 여름에는 깊고 넓은 저수지를 수영으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나의 수영 실력은 어려서부터 익힌 솜씨라 서울로 대학 진학한 후 한강 인도교 부근에서 수영으로 두 번씩이나 한강을 왕복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전쟁이 다시 나서 한강 다리가 또 끊어져도 헤엄쳐서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했습니다. 한때는 물살이 심한 지금의 잠실 근처 뚝섬 수영장에서도 한강을 헤엄쳐 건너갔다 와서 친구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40년부터 1950년 4월까지 10년을 별채에서 조부모와 지내다가 중2 때 청주로 유학 갔을 때는 우리나이로 14세였고, 그때 이후로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고향에 다니러는 자주 가지만, 이제는 그 국민학교 시절 천진난만하던 때의 친구가 거의 없습니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는 시골에서 막내 동생과 함께 사셨지만, 그때도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항상 손님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나는 이미 나이 세 살 때 어머니 품을 떠나 조부모 품으로 갔고, 그 후로 계속 타향살이를 한 끝에 이제는 외국에서 50년을 산 운명이 되었습니다. 내 사주대로 외교관은 되지 못했지만, 나는 외국에서 살 숙명을 타고 난 듯합니다.
음성 수봉 공립 국민학교는 1950년에 졸업한 내가 37회이니 1910년 경에 설립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전교생이 20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공부하려는 모든 학생을 수용하다보니 한 반에 60여 명씩 한 학년에 다섯 반이 있었고, 따라서 300여 명의 동급생이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음성에는 음성 농업고등학교가 있었는데, 해방 후 음성 중고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수봉국민학교 졸업생이 중학교로 진학하려면 대개는 음성중고등학교로 갔고, 극소수가 충북 도청 소재지인 청주로 갔습니다. 당시 음성에서 서울로 중학교를 진학한 동기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청주에는 사범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고등학교 등이 있었지만 제일 경쟁이 심하고 전통있는 학교는 일제 때 제일고보였던 청주중학교였습니다. 청주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보려면 수봉국민학교에서 석차 20위 안에 들어야 했으며, 대개는 이 중에서 10여 명이 시험을 치렀고, 그 중에서 운이 좋은 해는 2명이 합격했고, 평균적으로 1명 정도가 합격했습니다. 운이 나쁜 해는 한 명도 합격을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나던 초봄에 10명의 동급생들이 선생님 인솔 하에 청주로 가서 여관에 합숙했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 중에서 나 혼자 만이 합격하니 나의 조부님의 기쁨은 표현할 수가 없이 컸습니다. 조부님은 당시 정미소를 경영하여 부유한 편이어서 돼지 200근짜리를 잡아서 수봉국민학교 교장 이하 많은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천막까지 치고 크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흰 테가 달린 청주중학교 교복과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은 음성에서는 너무도 자랑스러웠던 일이다. 당시에는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듯이 4월 초 개학과 함께 음성에서 청주로 기차로 통학하면서 나의 중학교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음성에서 청주까지는 불과 44km이지만, 당시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열차는 이 거리를 달리는 데 2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중간의 도안재 고개를 올라가려면 기차의 힘이 모자라서 언덕 아래로 다시 내려 왔다가 10분 이상 증기를 압축하여 고개를 넘곤 했습니다.
아침 8시에 시작하는 학교 수업에 맞추기 위해서는 새벽 5시 반에는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매일 별을 보고 새벽 5시에 집을 나가 초저녁 6시 경에 돌아오는 고된 통학이었지만, 사범학교에 다니던 L 양, 여자상업학교에 다니던 K 양 등 국민학교 동기생들과 얘기하며 통학하는 재미도 있었고, 또 형이나 누님 벌 되는 선배 통학생들의 귀염둥이 노릇을 도맡아 해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