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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6.25 발발, 9.28 수복, 1.4후퇴의 격랑을 넘어 청주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미국 유학의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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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6.25 발발, 9.28 수복, 1.4후퇴의 격랑을 넘어 청주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미국 유학의 꿈을 꾸다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10.22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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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 장원호 박사
1950년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 한참 기차 통학의 재미와 청주라는 도시를 즐기고 있던 그 해 6월 25일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던 열세 살짜리 소년은 전쟁의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학교는 즉각 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음성으로 돌아 갔습니다. 북한의 인민군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멀리 피난을 못 가고 할아버지 친구가 사는 괴산군 벽촌으로 가서 숨었다. 음성에 인민군이 들어 온 몇 주 후, 할아버지는 방아간을 챙길 겸 다시 음성으로 돌아 올 때 나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나이도 열 세 살이고 비교적 큰 편도 아닌데다 전쟁에 끌려갈 나이가 아니어서 안전하리라는 게 할아버지의 판단이었습니다. 나는 9월 수복할 때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음성에서 인민군의 치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나무 더미 속에 감추어 둔 쌀도 인민군에게 다 빼앗기는 등 큰 고통을 받았지만 그외는 별 일 없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6.25 당시 폐허가 된 서울(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9월 28일 수복이 되어 질서가 잡히자,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전쟁으로 철도가 파괴되어 기차 통학을 할 수가 없었고, 나는 아버지 친구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게됐습니다. 수복 후에는 전쟁 중이라도 쌀이 필요한 곳이 급증해서 정미소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정미소는 세 대의 트럭으로 서울, 강릉 등에 양곡을 운반하였고 서울 신당동에도 창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정미소 사업이 이렇게 번창한 덕에, 나는 청주 하숙생활 기간 동안 재정적으로 넉넉한 가운데 처음으로 여러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시였던 당시 음성에서 청주까지 44km를 다닐 때는 자전거를 타거나 군용 트럭을 검문소 헌병에게 사정하여 얻어 타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트럭이 생겨서 그후로는 늘 우리 트럭으로 청주를 다녔습니다. 우리집 트럭이 일이 있어서 청주에 왔을 때, 나는 트럭을 타고 청주 시내를 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느날 우리집 트럭 한 대에 페인트 칠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나는 마침 주말이어서 청주 어느 곳페인트 칠하는 곳에 따라갔는데, 칠하는 동안 그 주변에서 놀다가 청주에 온 이후 처음으로 음성 출신이 아닌 청주중학교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보은이 고향인 유만조라는 친구도 나와 같이 청주가 객지여서 친구가 없을 때인지라 우리 둘은 만나자 마자 가까워졌습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그와 나는 형제와 같은 가장 까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당시 유만조와 함께 만난 친구 중에는 지금은 미국에 있는 고광숙, 그리고 서울에서 용산 중학을 다니다 청주로 피난 와서 주저앉은 오기정과 같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급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고광숙과의 친교는 음성 시골 소년이 미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숙의 큰 형님은 하버드에서 법학박사를 마치고 코네티컷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었고, 둘째 고광일 형은 1951년부터 미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셋째 고광종 형은 우리보다 3년 선배로 당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만조와 나는 하숙집을 청주 석교동에 있는 광숙의 집 건너편에 정하고, 학교가 끝난 후면 나, 만조, 광숙 이렇게 셋이서 매일 몰려 다녔습니다. 특히 광일 형이 우리를 귀여워해서 영어 교과서보다 한참 어려운 딕슨(당시 Robert Dixson이란 영문학자가 쓴 Dixon Series 영어 문법책, 리딩 책 등이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인기 영어 교재였음) 책을 읽도록 지도했습니다. 우리는 학교 공부보다 영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우리 모두는 어린 나이에도 언젠가는 미국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꿈대로 셋 중에서 제일 먼저 미국을 온 것은 고광숙이었습니다. 그의 큰 형 고광림 박사가 4․19 이후 민주당 장면 정부의 주미공사로 발탁됐으며, 그 분이 1960년에 서울을 다녀 간 그때부터 광숙이는 유학 준비를 하여 1961년에 형이 있던 보스톤으로 가서 지금까지 영주하고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내가 1966년 초 미국에 왔다. 나는 당시 광일 형으로부터 받은 자극과 도움을 지금도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계속 격랑 속으로 빠져 1.4 후퇴를 겪게 됐으며, 그 난리 통에 서울에 저장했던 양곡이 다 없어졌고, 아버지 정미소 사업이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중학교 기간은 전쟁의 상처가 지속되던 때여서 학교 공부에 충실할 수 없었습니다. 
1951년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사진. 국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를 1.4후퇴라 한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광숙이는 청주에서 제일 큰 석교국민학교 출신으로 청주 중학교에서 운영 위원장으로 당선될 정도로 지도력을 보였지만, 만조와 나는 광숙이를 도와 주는 정도로 학교 일을 했을 뿐 학교 내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애초에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하려했지만 그게 여의치 못해서 포기하고, 청주 중학교에서 새로 분리된 청주고등학교에 시험을 보아 진학했습니다. 청주고에 진학한 나는 다시 광숙이, 기정이 등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우리는 사춘기 고등학생답게 여학생들과 몰려다니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한 차례 연문에 휩싸여 흥분한 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내 주변에 여학생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후에는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요즈음 흔한 미팅을 많이 했고, 주말이면 함께 어울려 놀러 다니기도 해서, 많은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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