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7년 4월 27일(음력 3월 17일) 충청북도 음성에서 인동 장씨의 34대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인동 장씨의 시조는 1070년대의 고려시대로 올라가며 장씨는 우리나라 인구 중 일곱 번째로 많은 성입니다. 우리 집안의 직계 중 나의 고조 할아버지가 조선 왕조 때 정3품의 도통장군으로 지내다가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에서 은퇴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인 나의 증조부는 동학혁명 때 그 부근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전주로 동학군에 합류했다가 관군에 패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리더였던 나의 증조부는 당시 같이 가서 사망한 가족들의 보상을 하느라고 고향의 재산을 다 빼앗기고 결국 30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독자였던 나의 할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선조가 모셔져 있는 선산만 겨우 지켜서 보전해 놓고, 음성읍으로 나와서 정미소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때가 1920년대였습니다.
황새 한 쌍이 음성읍 생극면 관성리 저수지에 늘 날아 왔는데, 어느 포수가 그중의 숫놈 황새를 총으로 쏴 죽인 후, 암놈 황새가 외로이 알을 낳아도 무정란이어서 뒤를 못 잇는 일이 1970년대 초에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한국의 언론이 대서특필되어 전 국민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 황새가 살았던 나무도 우리 증조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일가 친척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가 들어가는 동네지만, 당시 관성리는 수십 가구가 어울려 사는 자그만 농촌이었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끈질긴 투쟁으로 보존했기 때문에 그 후에도 우리 가족이 묻힐 수 있는 선산을 유지하게 되었고, 또 명절 때마다 선친들에게 성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읍내로 나온 나의 할아버지는 사업에 제법 수완이 있어서 그 어려운 일제 강점기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슬하에 1남1녀,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와 고모 한 분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고모는 출가 후 아이 하나 없이 작고하셨고, 아버지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독자, 아버지도 독자이니, 나는 3대 독자 장손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1914년생입니다. 할아버지는 손을 빨리 보기 위해서 15세 되던 해인 1929년에 한 살 위인 어머니와 강제로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 결혼에 크게 반대한 나의 아버지는 수년 간을 만주로 가서 있다가 1934년경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할아버지 사업을 돌보기 시작 했지만, 이런 이유로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만주에서 돌아온 지 3년 후인 1937년에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손자인 저를 보았습니다. 그때가 아버지도 장가든 지 8년이 지난 23세여서, 당시로서는 늦게 득남한 셈이었습니다.
그동안 손을 못 보아 안타까이 후손을 기다리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머니의 임신 소식에 너무 기뻐서 당시 구하기 힘든 인삼, 녹용 등 좋은 한약을 많이 구해다 며느리를 먹였다고 합니다. 값진 한약을 복용한 어머니는 건강한 아들을 낳았지만, 유아는 열로 인하여 머리와 온몸에 종기가 심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던 그 시절이라, 나에게 별로 희망을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4월 27일에 태어났지만 지금 호적에는 8월 10일 생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때 내가 100일 동안이나 심하게 아파서 생후 즉시 호적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한약 덕분인지, 그후 나는 계속 건강하게 자랐으며, 지금도 추위를 남보다 잘 견디어 어려서부터 열많은 아이로 소문이 났습니다. 3대 독자 장손으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보다 조부모님으로부터 더 많은 귀여움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남동생 원흥이가 태어나기까지 나는 3대 독자로서 온갖 특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내가 세 살 때에 태어난 첫 동생 원흥이는 그후 조선일보에서 20년을 근무하다 데이터 베이스 진흥 센터의 전무를 거처 스포츠조선 판매국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습니다. 그 후 원일, 원식 등 두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 그리고 네 번째 남동생과 마지막 여동생이 태어나서,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5남 3녀의 대가족을 이뤘습니다.
원흥이가 태어난 1940년 12월 추운 겨울, 나는 부모님 댁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조부모 숙소로 옮겨졌고, 그때부터 10년을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음성을 떠나 청주로 유학 갈 때까지 나는 종손으로서의 온갖 특전을 누렸습니다.
조선 시대 풍속에 따르면, 장손은 조부모가 키워야 한다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부모님이 쓰셨던 별채는 부모님의 숙소로부터 200미터는 떨어져 있었으니, 나는 부모님으로부터의 보살핌과 사랑을 벌써 3세 때부터 거의 잊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13세 때 청주로 중학교 유학을 간 다음부터 나의 어머니는 늘 나를 "손님 같다"고 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크게 존경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가령 가정에 불화가 있으면 할아버지에게 와서 해결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하고 귀한 존재였으며 지금도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세 살이 될 때부터 한자를 가르치셨고, <명심보감>부터 유명한 사서 삼경을 전부 소개해 주셨습니다. 특히 집안 제사의 지방이나 축문에 대해서는 철저히 가르치셔서,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집안 제사의 지방과 축문은 모두 내가 직접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