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시 진구 황혜리
역시 마블이다. 사실 그동안 ‘토르’는 어벤져스 중에서도 그 위상이 다소 애매했다. 실질적인 리더 아이언맨과 정신적 지주를 자처한 캡틴 아메리카 사이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는가 하면 자신이 ‘초록색 덩어리’라고 부르는 헐크에게도 밀리곤 했다. 그러나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그는 드디어 각성했고, 자신에게 걸맞은 신화까지 써냈다. 영화는 진정한 힘을 가지고 근원을 각성한 토르가 묠니르의 신이 아닌 천둥의 신으로 거듭나는 성장 과정을 담았다. 동시에 마블 시리즈에 기대하는 유머와 액션까지 갖췄다. 다른 어벤져스와 차별화된 신화를 가진 영웅인 토르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작품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흡사 지옥을 연상케 하는 곳에 갇힌 ‘토르’가 자신이 그곳에 붙잡히게 된 연유를 설명한다. 토르 말고는 아무도 화면에 잡히지 않고 마치 관객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듯하지만, 아니다. 토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일종의 토르 식 ‘윌슨’이 있다. 토르가 갇혀있던 새장 같은 감옥의 문이 열리고 아스가르드의 멸망, 즉 ‘라그나로크’를 계획한 이가 등장한다. 마침내 대면한 두 존재(사람이 아닌 신과 악마와 같은 존재이므로)는 대화를 잇다가 서로 합의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장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토르는 아스가르드로 가는 다리를 놓기 위해 문지기 ‘헤임달’을 부른다. 그러나 늘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이자 충실한 신하인 헤임달의 반응이 평소와 달리 너무 늦다. 위험천만한 순간에 놓인 아스가르드로의 다리를 건넌 토르는 바뀐 문지기로부터 헤임달이 반역죄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직전의 전투에서 품었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고, 토르는 아버지 ‘오딘’에게로 향한다. 오딘은 백성들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지난 시리즈인 <토르: 다크월드>에서의 ‘로키’의 죽음을 재현한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 그것은 왜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로키스러운 광경이었다.
오딘은 로키에 의해 지구의 어느 양로원에 머물고 있었다. 토르는 로키의 만행에 분노하면서도 우선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로키와 함께 오딘이 머물고 있다는 해당 양로원으로 간다. 그러나 오딘은 사라지고 양로원 건물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어 토르가 로키에 책임 여부를 물으려 입을 떼는 순간, 로키의 발 아래로 차원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진다. 명함 한 장 달랑 남긴 채로.
남겨진 명함에 적힌 주소의 건물로 가 문을 두드리는 토르를 맞은 것은 닥터 스트레인지였다. 그는 토르가 로키를 데리고 속히 지구를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토르는 그에게 아버지 오딘을 찾기만 하면 로키와 함께 바로 떠나겠노라 약속했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를 위해 오딘이 머물고 있는 노르웨이의 어느 해안으로 차원의 문을 열어준다. 자신의 두 아들을 기다리던 오딘은 그들의 누이이자 죽음의 여신인 ‘헬라’의 존재에 대하여 말하고 이내 사망한다.
헬라는 오딘의 죽음 직후 그 모습을 드러낸다. 토르는 헬라에 맞서지만 그녀는 무려 토르의 망치인 묠니르를 한 손으로 부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지독하게도 파괴적인 그녀의 힘에 두려움을 느낀 로키는 도망칠 요량으로 급히 아스가르드의 다리를 연결한다. 이는 ‘헬라는 아스가르드에서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곳에 발을 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오딘의 당부를 제대로 듣지 않았기에 내린 오판이었다. 로키 덕에 헬라는 보다 손쉽게 아스가르드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 있었고 토르는 아스가르드로의 다리에서 헬라에 의해 낙오당한다. 그는 한 행성에 사로잡혀 해당 행성의 ‘그랜드 마스터’가 주최하는 토너먼트에 강제로 참가하게 된다. 만일 토르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 아스가르드로 돌려보내주겠다는 게 그의 조건이었다. 그런 토르의 토너먼트 상대는 다름 아닌 ‘어벤저스’의 멤버 ‘헐크’이고 헐크와의 대결은 토르가 진짜 ‘천둥의 신’으로서 각성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토르가 로키, ‘발키리’, 헐크와 함께 ‘리벤저스’라는 이름의 팀을 꾸려 헬라에 맞서 아스가르드를 구하는 과정을 그렸다. 강렬한 시작만큼 강렬한 끝이 인상적이었고, OST, 액션, 유머 등 무엇 하나 뒤처지지 않아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시리즈 중 단연 최고’라는 말에 수긍이 갈 정도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미있게 봤다. 헐크로 변한 채로 2년이나 지내는 바람에 혼동이 와 귀여웠던 ‘브루스 배너’부터 넘치는 자기애의 대명사 로키, 상징 중 하나였던 금발머리를 짧게 자르고 더욱 섹시해진 토르, 유연하게 뻗어나가는 액션을 선보이는 발키리, 너무나도 매력적인 마블 최초의 여성 빌런 헬라까지. 모든 캐릭터의 면면이 다 좋았다.
영화 속에게 정신을 잃어가는 토르의 무의식에서 오딘을 향해 토르는 말한다. “그녀는 너무 강해요. 묠니르(토르의 망치)가 없으면 이길 수 없어요.” 토르의 말을 들은 오딘은 웃으며 토르에게 묻는다. “네가 묠니르의 신이었더냐?’” 아니다. 토르의 망치인 묠니르는 토르가 잘 다루는 무기 중 하나였을 뿐, 토르는 ‘천둥의 신’이다. 어벤저스와 가족인 로키, 심지어는 관객들까지도 “역시 토르 망치가 최고야”, “토르하면 망치지”라며 망치가 토르의 전부라고 정의 내렸다. 이런 환경에서 신이자 영웅으로 살아온 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천둥의 신이 아닌 망치의 신이라고 생각해왔을 것이다.
우리도 토르와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나를 정의하는 대로, 남들이 원해서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맞추려 한다. 오딘이 비웃듯이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물었을 때, 문득 나는 내 자신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과연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가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영웅 영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별 말 아닌 것 같았던 오딘의 그 한 마디는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 나는 과연 망치의 신인가 천둥의 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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