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 발생한 ‘세 모녀 자살사건’ 기사를 접하고 난 뒤, 나는 마음이 매우 아팠다. 신용불량자인 30대 두 딸과 지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는 소득이 없었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했다. 단지 이 내용뿐이라면 나는 전에도 흔히 일어났던 가난으로 인한 자살사건이라고 생각하며 기사를 넘겨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 모녀의 방에서 발견된 편지에는 집주인에게 전하는 미안하다는 글과 함께, 밀린 방값과 공과금 금액인 70만 원이 들어있었다”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난 뒤, 나는 그 기사를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끝내 비극적인 선택을 한 이 세 모녀는 죽는 순간에도 집주인에 대한 미안함과 밀린 공과금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한 것이다. 정말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이 기억에서 채 지워지기도 전에 언론은 연달아 이 사건과 비슷하게 생활고로 인한 다른 자살사건을 보도했다. 그것은 한 일용직 노동자의 자살이었는데, 이 노동자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노동자에게는 오래전에 헤어져 행방도 모르는 아버지가 서류상 남아 있기 때문이었는데, 난 이를 듣고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먹고살기가 힘들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러 갔더니, 소식도 모르는 아버지가 서류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하지 못하게 되다니! 정말 당사자로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실제 기초생활수급자 선정 과정에서 부양의사나 능력이 없는데도 부모나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노동자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을 사람이 우리나라에 한두 명이 아닐 거란 생각을 하니 정말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의 또 다른 장벽으로는 ‘근로능력 평가기준’이란 게 있다. 근로능력 평가기준은 말 그대로 기초생활수급 신청자를 여러 가지로 평가한 다음, 근로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뉴스에서는 ‘세 모녀 사건’의 어머니와 큰딸도 부상과 지병으로 실질적인 벌이가 없었지만, 현행 기준에선 근로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수급대상에서 제외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 현실을 알면 알수록 한숨만 나온다. 차라리 알지 못했을 때가 마음이 편했을 거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이란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명 연예인 혹은 한때 이름을 알렸지만, 인기가 떨어지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사람들도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최근 연이은 생활고로 인한 자살로 다시 재조명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2011년, 지병과 생활고로 힘들어 하다가 이웃에게 숨진 채 발견된 최고은 작가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으로 소위 ‘최고은 법’이라고 불리는 ‘예술인 복지법’이 생겨났다. 예술인 복지법은 잘 시행되고 있을까?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예술인 복지법’은 제대로 시행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예술인 복지법 역시도 혜택을 받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워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3월 9일, ‘우봉식’이라는 또 한 명의 영화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자살 이유는 마찬가지로 ‘생활고’였다. 우리나라는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나는 정책이며, 제도며, 이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가 정말 위험하고 위태롭다는 것은 이번 기회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세 모녀와 최고은 작가, 그리고 배우 우봉식의 죽음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우리나라의 문제 많은 복지제도를 걱정하기 바쁘다. 그런데 기사를 찬찬히 찾아 읽어보던 나는 어느 한 기자가 쓴 글을 읽고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 글은 세 모녀와 최고은 작가가 숨진 채 이웃에게 발견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웃에 대한 관심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이웃에게 무관심했다. 하지만 이 글을 보는 순간, 복지제도만을 욕하고 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만약 나의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힘든 생활고를 겪고 있다면,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정부가 아닌, 옆집에 사는 이웃인 내가 아닌가? 하지만 옆집에 사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어떻게 옆집 사람들을 돕는단 말인가.
나는 복지제도의 여러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정작 복지제도의 혜택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 복지제도는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런 기사를 또 접하게 됐을 땐, 내가 오늘 느낀 부끄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도록, 나부터가 어딘가에서 내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웃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