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만점에 평점 4.22라는 높은 점수로 부산 동명대를 수석 졸업하고, 기술 관련 자격증을 15개나 보유한, 앞길이 창창한 청년이 있었다. 친구들의 부러움과 가족, 교수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 청년에게 대학 졸업직후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닥쳤다. 말이 갑자기 어눌해지고 몸이 온통 쑤시며 아파 병원에 갔다가 희귀병인 '소뇌위축증'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 병은 유전이나 뇌졸중과 같은 뇌 질환으로 후천적으로 발병하는 희귀병으로, 소뇌가 점점 작아지면서 말이 제대로 되지 않는 언어장애와 자유자재로 몸을 사용하지 못하는 운동장애를 동반한다.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법도 치료약도 없다는 난치병 중의 난치병이다. 이 진단을 받은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깊은 절망과 실의 속에서 그 청년이 선택한 것은 삶의 의지였다. "그래도 열심히 살자. 살다보면 희망의 빛이 보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위재영(34, 부산시 남구 용호동). 1998년, 재영 씨는 20세로 대학에 입학한 후 첫 학기에 우수한 성적을 올려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 때만 해도 재영 씨의 인생은 무지개 빛이었다. 재영 씨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러 은행에 갔을 때, 내야할 등록금이 0원이라고 적혀 있는 고지서를 처음 보았어요. 장학생 등록금 고지서를 처음 받던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때 느낀 성취감 때문인지, 공부에 재미를 느끼게 됐어요” 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장학금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매 학기 높은 성적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군대에서도 공부를 계속해서 자격증을 땄다. ‘남자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기 산업기사, 대기환경 기사, 사무자동화 산업기사 등 전공인 산업경영학에 관련된 기술 자격증을 모조리 섭렵했다.
이른바 훌륭한 ‘스펙’을 가진 재영 씨는 2003년 졸업 후 어렵지 않게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술 관련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따는 등 그는 철저하게 자기 계발에 힘썼고, 그의 성실함을 높여 본 여러 회사가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기도 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인생이 조금씩 헝클어지기 시작한 건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은 2007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있었던 재영 씨는 친구로부터 어딜 보고 있냐며 한 쪽 눈이 이상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저 기우려니 생각했던 눈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갔고, 재영 씨의 오른쪽 눈은 심각한 사시 증상을 보였다. 재영 씨는 일단 회사를 그만 두고 사시 교정술을 받았고, 수술 후유증으로 1년 간을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받았으니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재영 씨는 거리감과 공간 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고 어딘가 잘못 됐다는 생각에, 2011년 그는 뒤늦게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 병원에서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의 신경과 진료를 추천했다. 재영 씨는 그 병원에 가서야 자신의 상태가 단순 사시가 아닌 소뇌위축증이라는 생소한 병의 한 증상임을 알게 됐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심한 증상들을 겪게 될 거라는 진단을 받게 됐다.
“약도 없고, 수술 방법도 없어요. 앞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워 질지도 모릅니다.” 의사로부터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지만, 재영 씨는 곧장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잠시 잠깐 주저 앉는 것도 그에게는 불필요한 일로 느껴졌다. 재영 씨는 “남자가 한 번 태어났으면 뭐라도 해봐야지 그저 그렇게 살 순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그의 휴대폰에는 아직도 소뇌위축증 진단을 받은 2011년 5월 23일이 저장돼 있다. 그에게 그 날은 절망의 날이 아니라 희망의 끈을 굳세게 잡은 날이다.
첫 진단 후 3년이 흘렀다. 재영 씨 소뇌는 다른 사람의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진단을 받은 1년 후에는 그의 어머니까지 같은 병을 진단 받았다.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상황 속에서 재영 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하루에 6~7시간 씩 죽기살기로 운동을 해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4시반부터 운동을 했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소뇌위축증으로 조금씩 운동능력을 상실하다가 결국에는 누워서 생활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다른 환자들과 달리 재영 씨는 겉으로는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난간을 붙잡지 않고는 계단을 오르내릴 수도 없고 뛸 수도 없으며 과거에 비해 발음도 부정확해졌지만, 일상생활은 별 지장이 없다. 3년간 꾸준히 운동을 해 온 결과, 재영 씨는 자신의 몸무게와 비슷한 70kg짜리 덤벨을 다리 근력만으로 들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저처럼 완화된 케이스가 없다고 해요. 어머니는 걷는 것을 힘들어 하시지만, 제 노하우를 알려드리면서 함께 운동하고 있어요. 저는 이 병을 앓으면서 오히려 성격이 더 낙천적으로 바뀌었어요”라며 뿌듯함을 내비쳤다.
현재 재영 씨는 부산시 남구청 CCTV 관제 센터에서 5개월째 일하고 있다. 사실 재영 씨는 젊은 나이에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여러 직장에 이력서를 제출했다가 수없이 고배를 마셨다. 이력서에 빼곡히 적힌 그의 화려한 자격 사항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병의 증상으로 안구질환을 갖게 돼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운전 면허가 있어도 운전할 수가 없어요. 발음도 안 되다 보니 전화 업무도 힘들어요. 운전, 전화 업무가 불가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라고 재영 씨는 그 동안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다니는 직장은 그에게 더 없이 소중하다. 하루에 8시간씩, 4교대 근무에 매일 3~4시간 씩 운동을 하느라 빡빡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는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일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최근 재영 씨는 소뇌위축증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접했다. 그것은 수년 안에 상용화될 것으로 알려진 줄기세포 시술을 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영 씨는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알려진 줄기세표 시술에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병과 잘 싸워 왔듯이 자신의 힘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본인이 그 몹쓸 병에 걸렸는지 억울하지 않냐는 질문에 재영 씨는 뜻 밖의 대답을 했다. “저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런 병이 왔다면, 그 사람은 더 없이 암울하겠죠. 하지만 이 병이 저에게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특별한 사람이거든요. 저에겐 남들보다 우월한 정신력이 있어요. 저는 이 정신력으로 반드시 이 병을 이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