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남편, 1급 장애 아들..'그래도 삶은 살 가치가 있다'
얕은 비탈길을 오르는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여름이 성큼 다가온 어느날,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의 한 작은 18평 빌라 2층 집에서 김희순(67, 가명) 씨는 오늘도 부엌 일에 여념이 없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갸날파 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 이마와 뺨에는 깊은 주름살이 셀 수 없이 패어 있었다. 영화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반세기 인생이 만들어 놓은 상흔인가. 희순 씨는 마침 부치고 있던 커다란 부침개 몇 장을 곱게 썰어 음료수와 함께 탁자에 내려놓으며 취재기자를 상대로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남편의 폭력과 큰아들의 장애
처음 시집을 왔을 때 그녀의 나이 19세. 그때 당시 관습처럼 어른들이 정해준 정혼자와 결혼한 그녀는 여느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가정을 그리며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한 꿈은 금방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알고보니 남편은 툭하면 폭력을 일삼는 주정뱅이였던 것이다. 신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의 손찌검은 시작됐다. 수차례 맞다가 기절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기절했다 깨어나서 또 기절할 때까지 맞는 날도 있었다. 목숨만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남편은 폭력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저 화가 나면 상을 뒤엎어 부숴버리고 희순 씨를 구타하기 시작했고, 술이 들어가면 그 강도는 더욱더 심해졌다. 첫아이를 임신한 후에도 남편의 폭력은 도를 더해갈 뿐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발길질을 피해 도망 가던 희순 씨는 2층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뱃속의 생명은 무사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을 질기게 버텨낸 생명은 지체장애1급 정신박약아로 태어났다. 희순 씨는 기가 막혔다. 10개월 동안 품었던 아기의 탄생을 기뻐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보고 눈물지을 수도 없었다. 그저 희순 씨의 선택은 "이것이 운명인가" 하고 아들의 장애를 견뎌내고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머리를 찧는 것이 유일한 의사소통인 아들
희순 씨의 집 거실 벽은 사람이 앉았을 때 머리가 닿는 부분의 벽지가 다 닳아 시멘트가 훤히 보일 정도로 뚫려있다. 장애를 가진 큰아들 박정석(47, 가명) 씨의 유일한 의사소통 방법이 벽에다 자신의 머리를 찧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머리를 찧고, 어딘가가 아프거나 불편해도 머리를 찧어댄다. 푹신한 다른 무엇인가를 붙여놓으면 신경질적으로 뜯어 버리고 다시 머리를 벽에 찧기를 반복한다. 아들의 머리 역시 매일 찧어대는 그 부분만 탈모가 시작되고 있다. 희순 씨는 그 벽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그마한 벽지를 다시 그 자리에 바르며 눈물을 흘리고 곤한다. 아들의 머리를 한참 바라보던 희순 씨는 연신 “얼마나 아프겠노... 얼마나 아프겠노...”라고 말하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들은 머리를 찧어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밥을 먹는 것, 아니 숟가락을 드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가 없고, 추워도 옷이나 양말을 신을 수 없어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이런 큰아들 아래로 삼남매를 키우면서, 희순 씨는 일일이 손으로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자신의 나이 환갑이 넘도록 아들을 수발했다.
환갑이 넘으면서 희순 씨는 자신이 없어졌다.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이 점점 아파가는 자신이 죽고 나면 아들은 어쩌나 싶어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아들을 공기 좋은 요양원에 데려다 놓자고 생각했다.
희순 씨는 양산 산기슭 언저리에 좋은 요양소를 찾아가 아들을 부탁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요양소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씻으려고도 않고 먹으려고도 않는다는 것이다. 희순 씨는 부랴부랴 양산 요양소까지 갔다. 그제야 알았다. 아들이 낯선 곳에서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 극심한 불안감에 싸이고, 아들의 증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희순 씨는 1주일에 몇 번이라도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밥을 넉넉히 먹인 뒤 다시 요양소에 데려다 주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또 다른 아픔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희순 씨는 생각했다. 이상하게 몸이 조금 고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스트레스가 쌓인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모든 시련은 이제 끝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희순 씨에게 시련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신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콩팥을 이식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되었음에도, 이식을 해주겠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일단 떼어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이식해줄 사람을 결국 찾지 못한 채로 콩팥 하나를 떼어내었다. 희순 씨는 아직까지 인공 신장주머니를 차고 생활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면서 희순 씨는 옷으로 꽁꽁 감싸고 다녔다. 이제 한여름이 돌아오는데 얇아지는 옷차림이 희순 씨의 걱정거리 중 하나이다.그리고 믿었던 막내아들
희순 씨에게는 공부 잘하고 훤칠한 막내아들 하나있다. 형 때문에 치이거나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껴 투정도 부릴 만하지만, 막내아들은 단 한 번도 형을 원망하지 않았다. 희순 씨는 그런 아들이 대견스럽고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믿었던 막내아들이 언어 장애인을 부인으로 삼겠다며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희순 씨는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귀한 내 자식을..." 막내아들이 너무 아까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고 했다. 희순 씨에게는 막내아들의 그 여자를 어떻게든 떼어놓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만큼은 나쁜 시어머니가 되어버린 것이다. 온갖 폭언을 쏟아내며 가라고, 내 아들 곁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아가씨는 그저 울기만 할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큰아들을 데리러 가는 어느 날이었다. 큰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문득 그때 찾아온 언어장애인 아가씨가 생각이 났다. 만약 우리 큰아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서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상대 쪽 어머니 역시 나 같은 형편없는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희순 씨는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말을 못할 뿐이지 그 집에서는 귀한 자식으로 자랐을 텐데 싶었다. 우리 큰아들이 그러하듯이 얼마나 부모는 원통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자식을 키웠을지 그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로 집으로 돌아온 희순 씨는 막내아들의 결혼을 허락했다.슬픔 속에 피어난 작은 꽃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던 희순 씨는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었다. 눈물을 숨기려 희순 씨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독일인과 결혼한 첫째 딸과 손녀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혼혈이라 그런지 더 예쁜 것 같죠?”하며 환하게 그녀는 웃어 보였다. 이번에는 다른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봉사활동을 다니는 단체에서 한 장애인 시설 봉사활동때 찍은 것이라며 “이런 곳에 가보면 다 우리 아들이랑 며느리 같아서 마음이 더 아파서 한 번이라도 더 둘러보게 되는 거 같아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녀의 삶이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남편은 폭력을 일삼고, 콩팥을 이식해줄 사람은 찾지 못했으며, 큰아들은 여전히 거실에서 머리를 찧으며 알 수 없는 대화를 걸어온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도 대화를 한번 하는데 기나긴 시간이 걸리며, 그나마 심적으로 많이 기대었던 큰 딸은 먼 독일에 시집을 가버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 한 정도가 되어버렸다. 둘째딸은 아버지 같은 남자는 죽어도 싫다며 제멋대로 독신 선언을 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어찌 보면 나쁘게 변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희순 씨의 주름 잡힌 눈가는 수려한 목련 같은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른다. 희순 씨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혀 힘들지 않아요. 이게 제가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굳세게 살아내어야죠. 다만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우리 아들이 나보다 먼저 하루라도 먼저 가면 좋겠다는 거예요. 끝까지 내 손으로 돌보다가 보내는 게 지금은 꿈이에요” 라고 물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는 시선에 대해서, 희순 씨는 “조금 다를 순 있지만 틀린 것은 아니고, 도움은 감사하지만 동정은 싫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희순씨의 삶은 어쩌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희순 씨는 오늘도 많은 양의 약을 털어먹고 힘겨운 몸을 일으켜 다시 아들 같은 아이들을 돌보러 일어섰다. 그녀의 뒷모습은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끝없이 강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저작권자 © CIVICNEWS(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