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waits for no one.” 이 말은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제다. 이 작품은 위의 말처럼 시간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이는 시간은 소중한 것이라는 교훈을 넘어 시간에 관련된 긴장감과 안도감, 환상, 그리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타임 리프(Time leap) - 변한 세상과 변한 이야기
시계의 발명으로 인간은 시간을 관리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손목 위의 시계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울리는 각종 핸드폰 알람, 고개를 들면 보이는 벽시계 등 흘러넘치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예전 농업 사회의 시간은 열이면 열 모두가 똑같이 흘러갔다. 과거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농사를 짓고, 점심 때 밥을 먹고, 해질녘쯤 집에 들어와 해가 완전히 지면 잠자리에 드는, 그야말로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는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시간은 개인마다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질녘 쯤 일어나 새벽까지 깨어있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노동시간 또한 달라져, 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 전까지만 노동했다면, 지금은 시간제 근무가 보편화되어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패턴에 따라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나온 2006년 일본 사회는 앞서 말한 현대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이 작품은 시간이 사람들의 관리 하에 흘러가지만 사람들은 정작 자기 자신의 시간을 달릴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노동은 이미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고, 사람들은 ‘자유 시간’을 주게 되면 대부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심각하게는 ‘자유 시간’에 대한 불안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신의 시간 위를 달리라는 성장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 위를 달리기를 항상 갈망한다. 그런 인간들의 갈망은 타임리프(과거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나 타임워프(과거와 현재가 혼합된 상황)를 하여 시간을 되돌리고 자신의 기준에서 잘못 흘러가버린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바꾸는 내용을 보며 대리만족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욕망에서 나온 작품 중 하나다. 다른 시간 여행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타임 리프물이다. 타임 리프는 신조어다. 직역하자면 ‘시간을 뛰어넘다’는 말이고, ‘타임 워프’보다는 실현 가능해 보이는 현실적인 말이다. 우리는 이런 타임 리프 물에 익숙해져 있다. 예컨대 향불을 피우면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나, 최근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별에서 온 그대>와 <신의 선물-14일> 등이 타임 리프물이다. 과거 애니메이션의 시간에 대한 스토리텔링의 키워드는 ‘미래’였다. 미래가 시대적 배경이고, 고도로 성장한 인류의 윤택한 모습과 그에 대한 동경, 고도의 과학 발전이 불러일으킨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 대한 경각심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사는 현재는 과거(1960~80년대)에 비해 놀랄 만큼 과학 문명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발달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 이제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는 누구나 해봤을 법한 간절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갈림길과 선택 – BDC와 행복 총량의 법칙
만약 우리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주인공인 마코토가 치아키와 친구로만 남고 싶어서 치아키의 고백을 받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타임 리프를 쓰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마코토의 운명이 바뀌고, 치아키 또한 마코토가 타임 리프를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면서 피해간 불운이 타인에게 더 크게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마코토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인생은 B로 시작해서 D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는 C가 있다’는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인생은 탄생(Born)으로 시작해서 죽음(Death)으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는 선택(Choice)이 있고, 그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선택으로 ‘여기에서(ここから)’ 주인공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갈림길과 표지판 장면을 통해 말한다.
주인공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통해 시간을 되돌아가 시험을 잘 치거나 요리 실습 시간에 사고를 피한다. 마코토는 타임 리프가 마냥 좋은 것이며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지만, 사실 그로 인해 타인이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요리 실습 시간에 마코토에게 나야하는 사고를 시간을 되돌려 자리를 바꾸고 바뀐 학생이 낸 사고로 인해 그 학생은 이지메를 당하고 또 다른 2차, 3차의 피해를 낳게 된다. 마코토가 처음 타임 리프 능력을 얻었을 때는 몇 번이고 이 능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점점 주변사람들이 자신의 행운으로 인해 불행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 총량제, 즉 새옹지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행복 총량제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안 좋은 일을 통해 미리 대비할 수 있고 좋은 일에도 항상 겸손할 수 있는, 즉 내면의 ‘성장’을 깨닫게 하고 있다. 마코토가 시간과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성장하듯이.
마코토의 성장과 관객들의 성장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학원 로맨스 장르이자 성장 애니메이션이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초반의 천방지축인 한 소녀가 어느덧 시간에 의연해진 소녀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구공 하나 제대로 못 던지고 호텔왕, 석유왕 등 허황된 꿈을 꾸던 소녀가 자신만의 온전한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더 이상 시간이라는 것을 함부로 쓰지 않고, 타인의 시간에 개입하지 않으며, 올곧게 자신의 시간 위로 달려 나간다. 이렇게 한층 성장한 소녀 마코토를 바라보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성장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Time waits for no one,’ 즉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관객들은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소녀, 그리고 소녀
일본 애니메이션의 중심은 단연 소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대다수가 소녀가 주인공이고, 남성의 장르물에서도 필히 소녀가 등장한다. 이러한 소녀들은 사람들의 병리적인 집착을 이끌어 내어 ‘오타쿠’ 문화로 발전되었다. 사람들은 영원의 소녀상에 매료되어 그 속에 영원히 갇혀 살았다. 하지만 소녀는 성장한다. 이렇듯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 마코토도 기존의 몸은 성숙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하고, 책임감이 없으며, 대책 없이 이기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허황된 꿈만 가진 영원의 소녀에서 자신이 선택한 시간을 달리는 진화하는 소녀로 탈피한다.
시간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도 시간과 관련해서 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기차가 출발해야 하는 그 시간까지 꼭 기차를 타야한다는 것에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마코토가 위험한 순간에 맞닿아야지만 시간이 되돌아간다는 설정으로 마코토가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흘러가버려 위험에 빠질지 긴장하게 되며, 타임 리프의 횟수 제한이 있어서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되돌려 놓기엔 너무 많은 일이 생겨버렸고, 그것이 불가항력으로 다가오자,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가족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가족은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은 마코토의 타임 리프를 더 쓰게 만드는 존재이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작은 소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다. 이런 마코토를 이해해 주는 존재는 학창시절 자신 또한 타임 리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모 카즈코다. 가정의 부재는 주인공 마코토를 더욱 혼란시키지만 이모와 마코토는 서로가 맞지 않을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새 기름칠한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져 돌아가며 가정 이상의 역할을 해 낸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낀 점은 변화다. 이 애니메이션이 개봉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았을 때의 느낌과 시간이 지나서 지금 다시 보았을 때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학원 로맨스물이라고 치부해 버렸다면 지금은 나를 찾는 것, 내 시간 위에 온전하게 설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코토와 같이 성장해 나가는 성장물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처럼 내 시간 위를 달릴 수 있을 때 나 자신도 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도 확실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먼 미래에서 기다리는 ‘미래의 나’에게로 당당하게 달려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