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후진국인 필리핀은 가난한 사람도 많지만 부자도 많다. 그만큼 빈부 격차가 심하다. 길거리에서 사는 노숙자들도 쉽게 눈에 띄는 반면, 아우디나 벤츠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는 일도 어렵지 않다.
필리핀에서는 어느 후미진 골목이나 공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바로 노숙자들이다. 기자가 살고 있는 만다우에 시티(Mandauae City)에도 노숙자 가족들이 어김없이 생활하고 있다. 노숙자 가족의 어린아이들은 외국인이 지나가기만 하면 “Give me money"를 외친다. 그 아이들은 기자가 한국인인 것을 알아보고 ”안녕, 언니“라고 한국말로 말을 걸기도 한다.
더욱 충격적인 장면은 관광지에서 볼 수 있었다. 세부의 유명 관광지인 산토리뇨 성당 근처에는 판잣집이 즐비하다. 근처 편의점에서 관광객들이 음료수를 마시며 나오자, 4살 정도 돼 보이는 노숙자 아이들이 관광객들에게 맨발로 달려와 손을 내민다. 한 외국인이 음료수를 내밀자, 같은 노숙 어린이 열대여섯 명이 어디선가 더 달려 나온다. 함께 노숙하고 있는 어른들은 그저 앉아서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구걸이 생활인 듯 느껴졌다.
필리핀에서 오랜 시간 거주했던 한국인들은 절대 이들에게 돈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세부의 한 어학원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이준용(29) 씨는 “돈을 주면 대부분 음식을 사먹지 않고 본드를 산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본드 냄새를 맡는다”며 “정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면 작은 쿠키 정도를 챙겨주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직장을 가진 필리핀 사람들은 대개 생계를 이어갈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대학을 졸업한 필리피노들의 월급은 경력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30만원 전후다. 필리핀 물가가 아무리 싸다지만 이 급여로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부의 한 어학원 교사인 Jay-r(27) 씨는 “학원 근무를 마친 후 인터넷 강의 일을 하나 더 하고 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투잡 족은 필리피노들에게 흔한 일이다.
외국으로 일을 하러 떠나는 필리핀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리피노가 대한민국의 공장에서 일을 하면 필리핀에서 받는 평균 급여보다 몇 배는 더 받을 수 있다. 필리핀에서 5년 간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권유주(26) 씨는 “필리피노들이 한국에서 몇 년간 일하는 이유는 그 돈으로 집을 짓기 위함이다. 몇 년 만 타국에서 고생하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빈익빈 가난의 저편에는 부익부 편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이 있다. 세부에서 필리피노들의 실생활을 경험하려면 ‘카본 마켓’이라는 서민 시장을 가보라는 말이 있다. 구제 옷, 구제 신발, 그리고 값싼 식재료를 찾는 보통의 필리피노의 모습이 이곳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상류층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고가의 외제차를 몰고 다닌다. 번화가에서는 양주를 마시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필리핀은 소수의 사람들이 소득을 싹쓸이한다고 한다. 스페인 지배 시절부터 뿌리 깊은 거대 지주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마다 존재하는 토착 부호들이 필리핀 곳곳에서 부를 독점한다는 말도 들린다.
이렇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한 필리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리핀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아주 높다. 영국의 신경제재단이 조사한 행복지수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68위, 필리핀은 16위에 랭크돼 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한국인과는 달리 필리핀 사람들 특유의 여유로움이 그들의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한국의 60~70년대 모습을 닮은 필리핀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한국인의 끝없는 욕심을 역설적이게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