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프다고 말 안했나?”
“좋은 회사 다닌다고 자랑한 게 누군데! 내 그만두면 아빠는 뭐가 되나!”
반도체 회사에서 큰 병을 얻어 돌아온 스무 살 여린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한 아버지가 대기업을 상대로 산재 소송을 진행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대사다.
이 영화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직원 황유미 씨와 그의 아버지가 겪었던 일들을 다뤘다. 황 씨는 반도체 공장에서 얻은 급성백혈병으로 2007년 3월 사망했고 노동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자, 그의 유족들이 소송을 제기해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됐다.
황유미 씨가 사망한 지 11년이 지난 23일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장에서 발생한 백혈병 피해환자들에게 공식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며 긴 싸움은 끝이 났다.
황 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2008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시민단체인 ‘반올림’이 결성되면서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반올림이 삼성 측에 직원의 백혈병 투병 문제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자, 삼성 측은 미국의 인바이론사 등을 통해 반도체 제조와 백혈병은 인과관계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긴 싸움이 시작됐다.
이후 2014년 8월 서울행정법원은 황 씨 등 2명에 대한 산재가 인정된다고 확정했다. 반올림 소속 피해자 8명 중 6명이 만든 ‘가족대책위원회’와 삼성을 상대로 한 조정위원회(조정위, 위원장 김지현 전 대법관)가 구성돼 문제 해결을 논의했다.
8개월에 걸쳐 1차 조정안이 나왔지만, 조정 과정에서 세부항목에 대한 이견이 발생했다. 삼성전자가 발표한 자체 보상안에 반올림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그들은 지난 7월 제2차 조정을 통해 극적으로 합의했다.
조정위가 누구든 이를 거부하면 활동을 공식 종료하겠다는 엄포를 내리며 양측 의견을 바탕으로 ‘중재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중재 결정은 양측의 주장을 참고한 중재안이 나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종의 강제 조정 방식이다.
이번 중재안에 합의해 최종적으로 23일,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분 대표가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 ‘삼성-반올림 중재 판정서 합의의행 협약서’ 체결식장에서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11년 분쟁은 막을 내렸다.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김기남 대표는 “소중한 동료와 그 가족들이 오랫동안 고통 받았는데 이를 일찍부터 성심껏 보살피지 못했다”며 “병으로 고통 받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삼성전자는 과거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건강유해인자에 의한 위험에 대해 충분하고 완벽하게 관리하지 못했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삼성전자는 더욱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로 거듭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사과문과 함께 발표된 중재안에 따르면, 지원보상안과 지원보상위원회 위원장이 정하는 세부 사항에 따라 2028년까지 보상이 차질 없이 이뤄질 예정이다. 삼성전자의 보상업무는 반올림(반도체)과의 합의에 따라 제3의 독립기관인 ‘법무법인 지평’에 위탁하기로 결정됐다. 또, 오는 30일까지 회사 홈페이지에 사과 내용과 지원 보상 안내문을 게재하고, 보상결정을 받은 환자에게 사과문을 보낼 예정이다.
더불어 삼성전자는 중재판정에 명시된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 원을 전문성과 공정성을 갖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반올림과 합의했다. 김기남 대표는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가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