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에 가서 보니 한류(韓流)의 힘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길거리에 널려 있는 파친코 가게 간판에 우리나라 탤런트 배용준 최지우 박용하 등의 사진이 크게 붙어 있고 파친코 기계의 잭팟이 터지는 표시판에도 이들의 사진이 이용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매우 즐긴다는 파친코 게임 기기에 한국의 유명 탤런트들의 얼굴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일본 사람들의 생활에 이들의 인기가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뿐만 아니다. 호텔에 돌아와서 켜본 TV에서도 낯익은 우리나라 탤런트들이 열연하는 한국 드라마가 잇따라 방영돼 과연 일본에서의 한류 열풍은 대단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지켜본 한국 드라마는 대부분 위의 탤런트들이 나온 오래된 것들이고, 아니면 그와 유사한 내용의 청춘 애정물이어서 일본에서의 한류는 오래 전 특정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시점에서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귀국 이후 언론에 소개되는 한류의 현주소는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 전반에 걸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 영화의 일본 수출액은 지난 2002년 658만달러 이후 급격히 증가해 2003년 1389만달러, 2004년 4000만달러, 2005년에는 무려 6000만달러로 3년 만에 10배나 증가했고, 이는 한국 영화 해외수출액의 약 7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6월 초까지 몇 개의 손꼽을 정도의 영화가 팔린 것 외에는 계약이 되지 않고 있고 가격도 크게 내려가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도 이미 한류 썰물은 시작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달 개최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방송 프로그램 견본시인 ‘상하이 국제 방송영상 견본시 2006'(STVF 2006)에서는 한국 드라마의 위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올해 현지 바이어들의 ‘딜 메모'(프로그램을 공식 계약하기 전에 맺는 사전계약)가 30% 정도 줄어들고 있다"는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또한 중국에서도 혐한(嫌韓)ㆍ반한(反韓)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한국 드라마 수입을 억제한다는 소식이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 동안 갑작스럽게 진행된 한류 열풍이 다소 진정되고 우리나라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졌다는 측면도 있지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우리 측 책임이 더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몇몇 영화나 드라마가 일본이나 동남아에서 인기를 끌자 내용을 더 알차게 만들기보다 알려진 스타들을 동원해 비슷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놓거나 내용도 시원치 않은 부실 드라마까지 한류 열풍에 편승해 높은 가격에 팔아 먹으려는 한국 업계의 행태가 이러한 반(反)한류 정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국의 형편이나 문화적 자존심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가격인상과 일방적 문화홍보를 자행하는 것도 한국 작품을 거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대충대충'식 행태는 이미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보아 와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생각과 의식을 바탕으로 한 문화산업에서마저 나타나는 게 씁쓸하다. 우리는 상품 생산에 있어서 기술을 개발하고 작업을 꼼꼼히 해서 품질 높은 제품을 만들기보다 겉보기만 화려한 엉성한 제품을 만들어 싼 값에 팔아온 경우가 많고, 스포츠도 기본기를 닦고 저변을 확대하기 앞서 인기 있는 종목에 올인해 남에게 과시하려는 경향이 많다. 최근 끝난 월드컵 축구에서 외국 지도자들이 "한국은 드리블 등 기본기를 더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제는 우리도 생각을 바꿀 때가 됐다. 화려한 외형에 매달리기보다는 꼼꼼하게 내용을 챙기는 게 먼저다. 일정한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바탕과 내실을 다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우리가 이룬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