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네이버 지식in에 한 남성의 다급한 요청 글이 올라왔다. 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성이 SNS에 남긴 의문의 글을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가 남긴 글은
“ㅊㄲㅃㅇㅇㅅㅅㄱㄱㅍㅌㄷㅈㅌㅂㅎㅅㅅㅇㅅㅊㅊㅈㅍㅋㅇㅍㄲㅈ”
소위 띄어쓰기도 없는 초성 메시지였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석한 결과,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였으며, 이는 과거에 유행하던 한 패스트푸드 사 CM송 가사였다. 그 남성은 짝사랑하는 사람이 무언가 특별한 메시지를 담은 사랑의 응답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올해 1월 30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한 카페 게시판에 "전 남친의 메시지! 초성 신(神)들 모십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시됐다. 익명의 글쓴이는 헤어진 남자 친구의 SNS에 적힌 “ㅈㅁ ㄱㄹㅇ ㄴㅇㄷ”가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그가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그리워 ㄴㅇㄷ' 같은데, 'ㄴㅇㄷ'가 뭘까요?"라며 카페 회원들에게 이 의문의 초성을 해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바로 댓글이 달렸다. 그가 요청한 'ㄴㅇㄷ'을 사람들은 '내일도,' '나 운다' 등으로 해석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이것을 “정말 그리운 날이다”로 해석하자, 애초에 초성 해석을 의뢰한 사람은 "혹시 전 남친..? 정말 똑똑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SNS에 적힌 의문의 초성 메시지를 해석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포털 사이트에 '초성 해석'이라고 검색하면, 수많은 요청글들이 쏟아진다. 요청글 대부분은 헤어진 연인, 짝사랑하는 사람, 싸운 친구나 형제의 페이스북, 카카오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에 있는 의문의 초성 문자인 경우가 많다. 한 네티즌은 "헤어진 연인의 SNS에서 나온 초성입니다. 해석 꼭 좀 부탁 드립니다"라며 네이버 지식인에 초성 해석을 의뢰했다. 그는 의뢰한 초성 “ㄴㄱㄱㄹㅇㄱㄱㄸㅇㄲㄱㄷㅇㄲ”를 “내가 그리운 건 그 때일까 그대일까”로 해석한 답변을 초성의 진짜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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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성 해석기 사이트의 검색 화면. 4글자 이상을 입력하자 자세한 검색 방법이 나왔다(사진: 러버키트(//www.loverkit.com/_i/initial/)캡처). |
문장으로 추정되는 초성을 빠르게 해석해 주는 초성 해석기 사이트와 앱까지 등장했다. 초성 해석기로 ‘ㅂㄱㅅㅇㅂㅂㅇ’를 검색하면, ‘보고싶어바보야’가, ‘ㅅㄹㅎ’를 검색하면 ‘사랑해’가 나온다. 검색을 통해 자주 사용되는 자음과 초성이 자동적으로 선정되는 원리다. 한 초성 해석기로 'ㄴㄴㅈㅇㅎ'를 검색하자, '나 너 좋아해,' '난 널 좋아해,' '난 너 좋아함' 등 같은 의미의 문구와 '누나 좋아해,' '너 나 좋아해' 등 다른 의미의 문구가 나왔다.
초성 해석기 앱도 다양하다. 그 중 '초성해석기-자음해석, 초성퀴즈'는 10만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앱은 초성 검색 결과가 없을 경우, 해석을 의뢰하면, 다른 이용자가 답변을 등록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연애와 관련된 이색적인 테스트를 제공하는 앱 '러버키트'도 초성 해석기 기능이 있다. 러버키트 개발자는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 결과에 오차가 있을 수 있으니, 재미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밝히고 있다.
초성 해석기로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긴 초성 문자를 단번에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석을 의뢰한다. 연인, 친구, 형제, 부부 사이에 다툼이 있고 난 뒤 상대방의 SNS에 올라온 긴 초성 문자를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한 네티즌은 14일 네이버 지식인에 "와이프와 싸웠는데, (카카오톡에 아내가) 이렇게 적어 놨어요. 고수님들 해석 좀 부탁 드립니다"라며 초성 문자의 사진을 남겼다. 13일 같은 사이트에서 또 다른 글쓴이가 "동생이랑 싸웠는데, 동생의 카톡 상메(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써져 있는 초성 해석 부탁드려요"라는 요청글을 게시했다. 이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을 보면, 해석한 사람이 "설날에 사우나에 가셨나요?"라며 글쓴이가 겪은 상황까지 유추했다.
사람들이 쉽게 뜻을 알 수 없는 초성 메시지를 남기는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카카오톡에서 초성 글을 올린 사람들을 많이 본 대학생 이주현(24) 씨는 "그런 사람들 대부분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같다.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긴 싫고,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심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생 조은서(22) 씨는 "관심 받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말할 데가 없어서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그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예상되는 초성 문자가 실제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성이 남긴 초성 메시지가 알고 보니 한 광고의 노래 가사였던 해프닝도 그 한 예다. 대학생 이모(26) 씨는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초성 문자를 몇 차례 쓴 경험이 있다. 이 씨는 "배고플 때 'ㅂㄱㅍㄷ(배고프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처럼 일상적인 느낌을 쓴 것일 뿐이다. 별다른 의미나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초성 메시지를 쓰는 행동을 '초성 퀴즈'에서 비롯된 일종의 놀이로 보는 의견도 있다. 몇 년 전 인터넷 상에서 만화, 영화, 책, 노래 제목과 가사를 맞추는 초성 퀴즈가 유행했고, 초성 퀴즈를 풀기 위한 초성 해석기도 생겼다. 대학생 이준영(26) 씨는 "한 때 사람들이 초성 퀴즈를 푸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이 후 10대, 20대 사이에서 초성 퀴즈처럼 초성으로 문자를 쓰는 일도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SNS 상에 초성 메시지를 남기는 행동을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직접 표현하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성대 커뮤니케이션학부 정일형 교수는 초성으로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이슈를 만들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서로 초성에 대해 뜻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나 상대 모욕 등의 악의를 가지고, 초성을 쓰는 것은 좋지 못한 의사 표현"이라고 말했다.
부산대 심리학과 김비아 교수는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긴 초성의 배열로 쓰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하고 초성 메시지는 표현은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거나,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경우에 쓰는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요즘 사람들이 어미를 '~입니다'가 아닌 '~인 것 같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명확한 의사 표명으로 갖게 되는 책임감을 회피하고자 초성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